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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목소리로]농사에서 손 못놓는 이유

 강광석 전농 강진군농민회 정책실장

 

 

도시에 사는 자녀들이 부모님들께 늘 하는 말이 ‘이제 그만 농사지으시고 편하게 사세요’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어른들은 농사를 놓지 못합니다. 내일 돌아가시는 한이 있어도 오늘까지 일을 합니다. 팔 다리 관절 허리 안 아픈 데가 없는데 말입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입니다.


첫째로, 시골에서도 생활비가 적지 않게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각종 경조사에 일상 납부금까지 두 분이 사시는 데도 적게는 삼사십만원에서 많게는 백여만원이 훌쩍 들어갑니다. 자녀들이 용돈을 보내준다 해도 아주 여유있게 사는 분은 많지 않습니다. 손자까지 맡아 키우는 경우는 더 어렵습니다. 논 3000평에 밭 500평을 경영해도 손에 떨어지는 것은 별로 없지만 1년을 버텨내야 하는 어른들이 농사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둘째로, 땅을 내놓아도 지으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특히 경작여건이 좋지 않은 땅은 공짜로 준대도 나서는 사람이 없습니다. 대규모 경작은 거의 기계화되어 있습니다. 기계가 들고나는 데 어려움이 있는 땅은 놀리기 십상입니다. 천수답이나 산간 다랑이논, 채 100평이 되지 않는 꼬불꼬불 밭떼갱이는 천생 어른들의 땀방울을 먹고 곡식이 자랍니다.

가족史 깃든 땅 놀리기 용납못해

셋째로, 지금도 어른들은 땅을 놀리면 천벌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먹을거리와 곡식은 하늘이 짓는 것입니다. 노동과 땅이 사람을 만나 열매를 맺는 거죠. 생명을 만들고 키우는 일은 종교처럼 신성합니다. 땅에서 만든 곡식으로 보릿고개를 버티고 자식들을 가르치고 결혼시켰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 분 한 분에게 농사는 인생이요, 추억입니다. 한평생 자신과 가족의 역사가 깃든 땅을 놀리는 것을 스스로 용납하지 못합니다.

넷째로, 농사말고는 특별히 할 일, 할 놀이, 할 말이 없습니다. 면소재지까지 가서 요가를 하겠습니까? 아니면 그 연세에 군까지 나가 수영을 하겠습니까? 3월부터 그해 11월까지 한가한 사람이 없습니다. 농사이야기 말고는 할 말도 없습니다. 농사를 짓지 않으면 일단 동네 주류사회에서 멀어진다고 봐야 하고 ‘이제는 산으로 갈 일만 남았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육체적 한계 때문에 자신의 일을 놓는다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두려운 일입니다.

이 모든 이유를 다 합쳐도 다섯번째 이유만 못합니다. 자식사랑 때문입니다.

시골에서 가장 성업 중인 직종이 장례식장과 택배회사입니다. ‘택배회사 먹여살리다가 결국 장례식장으로 간다’는 말이 유행입니다. 봄나물부터 겨울 김장배추까지 패키지로 보냅니다. 손자들까지 오순도순 나누어 먹을 모양을 생각하며 온몸이 쑤시는 고통을 참습니다. 김용택 시인은 ‘우리 아빠 시골 갔다 오시면’이라는 시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우리 아빠 시골 갔다 오시면/ 시골이 다 따라와요/ 이건 뒤안에 상추/ 이건 담장의 호박잎/ 이건 앞마당에 토란잎/ 이건 위꼍에 애호박/ 이건 강 건너 밭에 풋고추/ 이건 장광에 된장/ 이건 부엌에 고춧가루/ 우리 아빠 시골 갔다 오시면/ 시골이 다 따라와요/ 나중에는 잘 가라고 손짓하시는/ 우리 시골 할머니 모습이 따라와요/ 할머니 보고싶어요.”

자식에 결실 나눠줄 기쁨 가장 커

토방 기둥에 명패보다 크게 붙어있는 택배회사 전화번호가 가끔 수인번호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아무리 경제가 어려워도 떨어질지 모르는 농촌주식회사 부모님 펀드는 도시 자녀들의 가장 안전하고 정감어린 재테크 수단이 된 지 오래입니다. 자녀들의 나이만큼 자라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이제 그만 농사지으시고 편하게 사세요”라는 말에 “오냐 천천히 한다. 할 만한께 한다”고 대답하십니다. 혹시 “이번 주말에 못자리하러 내려갈게요”라고 말하면 부모님은 틀림없이 읍내 장에 갔다오실거고 그날은 잠시 옷단장하고 오랜만에 허리를 펴보는 날이 될 것입니다. 조그마한 밭에서 자식 손자까지 놀러와 고추를 심는 풍경이 올해 부쩍 줄었습니다. 휴일이 줄기도 했지만 여기저기 다 살기 팍팍한 모양입니다.

 


<강광석 전농 강진군농민회 정책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