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외치신 대한독립 만세

이선 박사, 국제기술사

 

나의 어머니, 고 왕종순 권사는 3·1만세운동 1주년이 되는 192031일 당시 15세의 나이로 배화학교 기숙사 언니들과 함께 필운대 언덕위에 올라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 만세를 하늘 높이 외치셨다. 그들은 다시 교정으로 내려와 계속 만세를 불렀다. 종로서 형사대가 급습하였고 24명의 학생이 종로서로 연행되었고 서대문 형무소에 나란히 수감되셨다. 이 사건이 바로 기미독립운동 1주년 만세소요사건이며 어머니는 서대문 형무소 감옥 11호실에 4명이 함께 수감되셨는데 바로 앞방에 유관순 언니가 수감되어 계셨다 한다. 어머니는 징역 1년형을 받으셨으나 이은 왕세자의 생남으로 6개월로 감형되어 출감하신 후, 학업을 계속하여 1922년에 배화학당을 졸업하셨다. 그 후 원산 루시 여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시다가 대판Baptist여자신학교를 졸업하셨다.

어머님의 고향 철원은 95년 전 3·1운동 당시 겨우 1400여 호에 지나지 않았건만 만세 대열에 참가한 사람이 연인원 7만여 명을 헤아려 독립운동자들이 끊어지지 않은 곳이다. 그 중에도 일제의 감옥에서 순국하신 이봉하, 김재근, 박연서, 이용우 김완호, 오세덕, 조종대선생 등 철원애국단의 선조들을 비롯해 박용만, 박용각, 박용철, 김세준, 엄재형 등 임시정부의 요원으로 활동하신 정의의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곳이다. 망국의 시련 속에도 독립에 대한 강한 신념으로 민족의 자주와 자유를 위해 독립운동의 봉화를 높이 쳐든 선조들이 보여준 도도한 자신감과 의연함에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1967년에는 이러한 애국지사들의 애국심과 독립정신을 기리는 뜻에서 애국선열추모비가 건립되었고 매년 31일이 되면 이들을 추모하는 기념행사를 치르고 있다.

어린 시절 어머님이 성장하신 월하리와 관전리 일대는 독립운동가 마을로 불려 질 만큼 한 두어 집 건너 한집은 독립운동가 집안이었던 만큼 고장의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 어머니는 1918년 철원군에 위치한 배양초등학교를 졸업하시고 그해 서울에 위치한 배화학당의 고등과에 입학하시였다. 배화여중 당시 최연소자(당시 15)로 독립만세를 부르다 투옥되신 어머님은 박용만선생의 이웃집에서 태어나셨고 독립운동사 편에는 10여명이 넘는 독립운동가가 이 마을태생이라고 기록되고 있다. 지금도 이 마을에서 어머님이 왕종순 누나로 일컬어지며 칭송되고 있음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지난 31일 망내 아우(이번 교수)와 함께 어머님의 고향 철원을 방문하고 어머님의 발자취를 돌아 볼 기회를 가졌다. 철원중고등학교 교정에서 개최된 ‘3·195주년 철원독립운동선열 추모식에 참석하고 어머님이 어려서 다니셨던 철원제일교회(당시 박연서 담임목사)도 방문하고 소이산 정상에 올라 광활한 철원평야를 바라다보기도 하였다. 당시 철원제일교회는 선교와 애국운동의 중심지였으며 지금은 전쟁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파괴되어 현재 전면 출입구 등 일부만 남아 있으며 대한민국 근대 문화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다.

3·1절은 우리에게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다. 나라를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총독치하의 치욕적인 식민지로 전락했던 당시 우리민족의 참상과 역사의 교훈을 우리 국민 모두가 되새기며 반성하는 삶의 자세를 가다듬을 때 독립선언서가 예고했던 신천지의 탄생은 통일의 형태로 우리 앞에 전개될 것이며 옛 도읍지 철원이 통일 한국의 통일 수도로 재탄생될 것이다.

*** 일제의 감옥에서 순국하신 - 명단과 내용에 오기가 있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