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들 ‘농기계은행제’ 반발


정부가 농촌의 중고 농기계를 사들여 농가의 부채를 줄이겠다며 내놓은 '농기계은행' 정책이 '빛 좋은 개살구'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10일 전국 농협지역본부와 농업인들에 따르면 농림수산식품부농협중앙회 자금으로 다음달부터 2012년까지 1조원의 사업비로 농기계은행을 세워 농업인들로부터 중고 농기계를 사들인 뒤 이를 다시 빌려주는 사업을 하기로 했다. 농협은 우선 3000억원으로 다음 달부터 내년 말까지 전국 회원농협을 통해 2만 8000여대의 중고 농기계를 사들인다. 구입가는 새 농기계 값의 80%선을 상한으로 사용 연한과 상태 등을 고려해 결정된다.
농협이 사들이는 농기계는 논밭을 가는 트랙터와 모를 심는 이앙기, 벼를 수확하는 콤바인 등 값이 비싼 3개로 한정했다. 또 사용 연수가 2년 이상 남아야 하고 기계적 결함이 없어야 한다. 더욱이 농협에 빚이 있는 농업인 가운데 대출금 연체가 없어야 하는 등 규정이 까다롭다. 기계 값을 농협 빚 변제에 쓰기 때문이다. 농협에 빚이 없는 농업인은 농기계를 팔 수 없다.

거의 새 기계 싸게 매도해야 할 판
새 트랙터 가격은 1300만∼8700만원, 승용(농업인이 타고 일함) 이앙기는 1350만∼2650만원, 콤바인은 3550만∼8350만원이다. 새 농기계의 사용 연한은 트랙터가 구입한 지 8년, 이앙기와 콤바인이 각 5년으로 정해져 있다. 결국 농업인들이 산지 얼마 안된 새 농기계를 팔아야 한다는 것이다.

농도(農道)인 전남에는 트랙터 3만 3728대, 승용 이앙기 1만 1199대, 콤바인 1만 3625대 등 모두 5만 8552대가 있다. 농협 전남지역본부는 올해 400억여원으로 중고 농기계를 구입한다.

기계화 농업을 하는 이종대(46·전남 장흥군 장평면 용강리)씨는 "수천만원짜리 농기계를 산 지 얼마 안돼 싼값에 팔아 빚 갚고 나면 농사는 무엇으로 지으라는 말이냐."며 시큰둥해했다. 또 다른 50대 농업인은 "농기계를 팔아서 농협 빚 갚고 나면 손에 쥐는 게 없는데 어떤 농사꾼이 농기계를 팔겠느냐."고 반문했다.

지난달까지 전남도내 19만 4565농가가 진 빚은 가구당 평균 3100만원으로 집계됐다. 농협 관계자는 "지금 당장 농업인들이 농기계은행을 어떻게 이해하고 얼마나 농기계를 팔지 짐작조차 안 된다."고 말했다.

농기계 임대도 내키지 않아
농협 경남지역본부는 올해 147억원으로 82개 회원 농협에서 중고 농기계를 사들인다. 내년 147억원 등 2012년까지 490억원이 들어간다. 대부분의 농업인은 농기계를 살 때 농협에서 농기계 값의 70%선까지 연리 3%로 융자받았다. 경남농협 관계자는 "실제로 농업인들이 얼마나 호응해 줄지 의문시된다."고 말했다. 일부 농민은 "농기계는 자식처럼 애지중지하는데 내 것을 팔고 남의 것을 빌려 쓴다는 게 내키지 않는다."고 불평했다.

농협 경북지역본부도 올해부터 2012년까지 도내 107개 지역 농협을 통해 중고 농기계를 구입한다. 예산은 1284억원(한 곳당 12억원)으로 잡았다.

그나마 신용불량자는 대상서 제외
농협 제주지역본부는 올해 농기계 구입 예산으로 69억여원을 잡고 있으나 농업인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농협 관계자는 "제주는 하우스 감귤, 한라봉 재배 등에 따라 농가에서는 농기계 구입 부담보다 하우스 시설비 부담이 더 크다."면서 "농가 부채를 덜어 주려면 하우스 시설비 부담과 연료비 지원 등 실질적 방안이 절실하다."고 설명했다. 제주 농업인들은 "노령화로 트랙터 등 농기계를 직접 다룰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아 농기계만 빌려 준다는 게 문제가 있고 하려면 운전자도 함께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농협 강원지역본부는 내년까지 중고 농기계 구입용으로 549억원을 배정했다. 농협 강원본부 김병호 농기계담당 차장은 "조합원들의 손실을 막기 위해 연체된 신용 불량 농민들에게까지 혜택을 줄 수 없어 반쪽짜리 지원책에 그칠 우려가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농기계를 구입한 뒤 융자 잔액이 남아 있는 농민들에게만 실질적인 혜택이 주어져 실제 수요자는 많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농협, 정부 예산지원 없어 불만
한편 농협중앙회 차원의 구체적인 농기계 구입 예산확보 방안은 아직 마련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농협 내부에서는 이 정책이 농가부채 탕감 차원에서 추진되고 있지만 정부의 예산 지원도 없이 진행돼 불만이 나오고 있다.

전국종합 무안 남기창기자 kcna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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