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oticon  국민보도연맹사건
``민간인 학살한 국가가 시효 완성 주장하는 건 권리남용"

 

 국민보도연맹은 좌익관련자들을 전향시킨다는 명목으로 1949년 정부가 만든 관변단체이다. 이듬해 6·25 전쟁이 일어나자 내무부는 국민보도연맹원 등을 구속하도록 지시하고, 그 뒤 계엄이 선포되어 예비검속이 진행되었다. 울산에서는 국민보도연맹원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된다. 군인과 경찰들이 좌익사상정도에 따라 처형자를 선별한 후, 총 10차례에 걸쳐 집단총살을 자행한 것이다. 이른바 울산국민보도연맹 사건이다. 국가는 진상을 알려달라는 유족들을 되레 처벌하거나, 희생자 합동묘를 해체하고 처형자 명부를 3급 비밀로 지정하는 등 진실을 숨겨왔다. 

 

사건 발생 55년 만인 2005년 유족들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과거사위)에 진실 규명을 신청했고, 과거사위는 진상조사 끝에 2007년 11월 407명이 희생되었다는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대통령까지 공식 사과하기에 이르자 이듬해 유족들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1심(서울중앙지법)은 2009년 유족들의 청구를 일부 받아들였으나 2심(서울고법)은 원고 전부패소 판결했다. 한마디로 "소멸시효가 지나버렸다"는 것이었다. 유족들은 대법원에 상고했다. 

 

법의 중요한 개념 중에 시효가 있다. 어떠한 상태가 일정한 시간 계속되면 이것이 진실된 것인지를 묻지 않고 그대로 존중하겠다는 것이다. 그 중 민사의 소멸시효는 일정기간 동안 권리를 행사하지 않으면 그 권리가 사라지도록 만드는 제도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전세권, 저당권의 소멸시효는 20년, 일반 채권은 10년이다. 더 짧은 것도 있다. 체불임금은 3년, 술값은 1년이 지나도록 달라고 하지 않았다면 법적으론 돌려받지 못한다. 하지만 민간인을 학살하고, 그것도 모자라 수십년간 은폐해온 국가가 소멸시효를 내세워 손해배상을 거부하는 게 타당할까. "그렇다"고 대답한 2심(서울고법)과 달리, 대법원은 "부당하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지난달 30일 "국가는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부담한다"면서 "유족들에게 진상을 은폐한 국가가 이제 와서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하는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여 권리남용으로서 허용될 수 없다"며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 전시 중 경찰 군인의 위법행위는 외부에서 알기 어려웠고 ▲ 따라서 국가를 상대로 배상을 청구한다는 것은 기대하기 힘든 점 ▲ 전쟁 시기에 국가가 자행한 기본권 침해에 대한 구제는 통상의 법절차에 의해서는 사실상 달성하기 어려운 점 등을 들어 원심을 파기했다.

 

앞서 서울고법은 희생자들이 사망한 1950년 8월을 기준으로 5년이 경과한 1955년 8월 시효가 완성됐다고 판단했다. 서울고법의 판결은 마치 "왜 50년 전에 국가에 배상을 청구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는 것과 같다. 반세기동안 영문도 모른 채 '빨갱이 가족'으로 살아온 유족들로서는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대법원은 진실규명결정이 있었던 2007년 11월을 기준으로 하면 아직 시효가 남았다고 보았다. 사건이 다시 2심으로 내려간 만큼 서울고법이 파기환송심에서 좀 더 현명한 판단을 내려줄 것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