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해 열사는 1947년 8월 7일, 전남 영암에서 아버지 이길윤씨, 어머니 박매심씨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 위에는 누나가 있었고 그 아래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었다. 그가 5살 되던 해에 6.25전쟁이 터져 그는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누나와 뿔뿔히 흩어져 지냈다. 전쟁이 끝난 후 그의 가족들은 전라북도 장수에 터전을 잡는다. 그의 일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수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고 그는 여기서 유년기를 보낸다.
초등학교 때는 말수가 그리 많은 아이는 아니었다. 그의 손에는 항상 책이 있었고 성격은 온순하고 차분하여 친구들과의 사이도 원만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활달하고 책임감이 강한 소년이었다. 그에겐 친구들이 다투다가 사이가 멀어지면 이들을 설득, 꼭 화해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옳고 곧은 성격으로 의협심이 강했으며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은 끝까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엇다. 선생님께는 칭찬을 많이 받는 학생이었고 예쁘장한 외모태문인지 여학생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전주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그는 여름방학을 맞아 집에 돌아오면서 여동생에게 진주구술로 된 목걸이를 사다 줄 정도로 자상했다. 어린동생들의 잦은 투정도 점잖게 타일러 넘길 줄 알았으며 우애가 깊었다. 그 당시 그는 전혀 과격한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앞으로 그에게 닥칠 일들을 예상하지 못했다. 사진에서 보이듯 그는 뽀얀 피부와 또렷한 외모에 크고 빛나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유연함 속에 강인함이 깃든 그의 유년시절의 모습에는 강한 의지가 보인다.
 
 
중·고등학교 시절 
 이 열사의 부친은 싸전(남원 쌀집)을 하고 있었다. 그 당시는 장수에서 남원쌀집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부친은 고향 어르신의 말에 의하면 덕이 높은 분이라 한다. 한 번은 어느 산골에 가난한 병든 임산부가 있었는데 눈이 많이 오던 추운날, 임산부는 진통을 시작했다. 그 소식을 들은 부친은 사람을 시켜 쌀 한가마니와 미역을 보내주었다 한다. 그의 부친은 사람들에게, 이웃에게 인색하지 않았으며 마음이 큰 그릇의 소유자라고 전해진다. 장수의 어르신들에게 이 열사는 아직도 남원쌀집의 아들로 기억되고 있다.
그런 그의 아버지는 큰물에서 좋은 물고기가 난다며 이 열사를 전주의 중학교로 보낸다. 그는 중학교때부터 농업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그 계기는 스스로 병아리를 사육하면서부터였다. 자기 손으로 직접 병아리를 키우며 생명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고 커가는 병아리를 바라보면서 사육의 기쁨과 보람을 알게 되었다.
전주 서중학교를 졸업하고 농업이라는 분야에 대한 호기심으로 전주 농업고등학교에 진학한다. 고등학교 진학 이후 그는 보이스카웃 활동을 시작,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보이스카웃 활동을 하면서 사람을 배려하는 법과 리더십, 책임감 등을 배웠다. 훗날 농민운동가로서의 초석이 이 시기에 다져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군대를 제대하고 그는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하게된다. 싸전을 그만두고 제재소(목재소)를 운영하던 아버지는 마음을 잡지 못하는 그를 데리고 일터에 나가기 시작한다. 당시 추운 겨울 날, 그는 산에 올라가 여러 일꾼들과 섞여 벌목을 하며 아버지 일을 도왔다. 그 속의 사람들은 그 동안 그가 봐왔던 주변사람들의 생활과는 너무나 달랐다. 고된 일상 속에서도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고 오히려 환한 미소를 가지고 힘차게 일하는 일꾼들의 모습을 보고 그는 비로소 사람다운 사람이 무엇인지, 사람다운 삶이 무엇인지 가슴으로 깨닫게 된다.
 
 
청년기
그는 공부를 다시 시작한다. 고려대 시험에 낙방하고 서울 건국대학교 잠업과에 입학 후 서울 농업대(현 서울시립대)로 편입한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그는 산악과 태권도를 접한다. 그에게 산악이란 단순한 취미생활이 아니었다.
산악동아리의 회장을 맡게 돈 그는 전국 방 방곡곡의 명산을 찾아 동아리 회원들을 이끌고 산을 탔다. 그의 어깨에는 꼭 3개씩 되는 배낭이 들려졌다. 정이 많았던 그는 자기 배낭뿐만 아니라 힘에 부쳐하는 친구들 것까지 둘러메야 마음이 놓였다. 야영을 할때도 그는 친구들의 천막을 쳐주고 나서야 자기의 천막을 쳤다.
산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넘쳤던 이 열사의 대학시절 진짜 꿈은 농촌에 들어가 상록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4-H연구팀에 가입해 농촌에 정착하기 위한 이론적인 바탕을 세우고 실습을 통해 영농현장을 체험했다.
남들보다 관찰력과 탐구력이 뛰어났고 도전의식이 높았던 그는 친구들에게 멧돼지란 별명으로 불렸다. 그 당시 이 열사의 가정은 고등학교때와는 달리 기울어져만 갔다. 싸전을 그만두고 제재소를 시작한 이 열사의 아버지가 사기를 당한 것이다. 하지만 이 열사는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대학생활에 충실했고 교수님들에게도 인정받는다.
 
 
새로운 만남과 결혼 
이 열사는 1974년 11월 24일 김백이 씨와 결혼한다. 김씨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한 재원으로 조선일보 회장이었던 방일영씨가 운영하던 '산'이라는 전문산악잡지사에서 방일영씨 비서로 근무했다. 그래서 김씨 또한 산악을 즐기고 있었다. 그는 동양 산악회에서 김씨를 처음 만난다. 아담한 키에 두툼한 입 술과 약간은 중후하며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고 샛별같은 또랑또랑한 눈이 매력적이었다. 처음에 이들은 산악인으로서 대했지만 차츰 서로에게 호감을 갖기 시작한다. 김백이 씨는 이 열사의 성실함과 자상함에 마음이 열렸다. 당시 김백이씨는 산을 타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지니고 있었고 이 열사는 그런 그녀를 산처럼 안아주었다. 시간이 지나 둘은 서로를 인정했고 전국의 모든 산을 누비며 불같은 사랑을 나눴다.
남산 순환도로에서 데이트를 즐기던 어느날, 이 열사는 느닷없이 김씨에게 제안 하나를 한다.
집에서 키우는 토끼로 코트를 만들어 주고 싶으니 같이 시골에 가자는 것이었다. 김씨는 소박한 이 열사의 프로포즈가 그렇게 달콤할 수 없었다.
이 열사는 졸업과 동시에 결혼, 곧장 장수로 내려간다. 신혼여행으로 둘은 전국일주를 택했다. 배낭 하나씩 짊어지고 떠난 신혼여행의 마지막 여행지는 김씨가 산에서 잃은 첫사랑의 묘. 둘은 산소에 절을 했고 이열사는 김씨를 행복하게 해주겠다며 김씨의 첫사랑 앞에 다짐을 했다. 그 날 김씨는 까만피부를 가진 김씨에게 '까만돌'이란 별명을 지어주며 첫사랑이 건네준 검정 조약돌 2개를 버리려 한다. 그러나 이 열사는 젊은 날의 소중한 추억이라며 다시 김씨의 주머니에 검정 조약돌 2개를 조용히 넣어준다.
둘은 신혼여행을 마치고 장수읍에서 약30km 떨어진 대성리라는 부락에 터를 잡고 그이 농장을 세운다. 전기도 안들어오는 곳에서 젊은 학사부부는 농장개간에 힘을 다했다. 직접 벽돌을 만들어 지은 집은 단칸방이 다였다. 낮이면 황무지를 일구기에 바빴고 해가 지는 저녁에는 호롱불을 켜놓고 책을 읽었다.
 
 
서울농장을 경영하다
김백이 씨는 혼수를 땅으로 대신했다. 전라북도 장수읍 대성리에 이 열사 선친의 땅이 있었는데 그곳이 마음에 들었던 그녀는 그 곁의 기름진 땅을 사들여 농장을 세운다. 김씨는 서울 태생이었고 둘의 만남이 서울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농장이름이 '서울농장'이라고 지었다. 처음엔 온 식구들이 농촌 생활에 반대했다. 그의 아버지는 서울에서 좋은 직장을 얻어 살길 원했고. 폐물까지 팔아가며 대학등록금을 보탠 장남이 다시 농촌에 들어와 농사짓고 산다는 것에 대한 어머니의 반대도 완고했다. 하지만 이 열사는 앞으로 몇 년만 지나면 대한민국 국민들의 밥처럼 우유를 먹는 날이 올 것이라며 어머니를 설득했다.
그는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선친의 산을 개간하여 초지를 만든다. 동네아주머니, 아저씨들과 함께 돌을 추려내고 넓은 밭도 일궜다. 집을 짓기 위해 직접 구어 논 벽돌이 다 뭉개지거나 일사 병에 몸져눕는 일도 많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축사 한쪽을 막아 고생 끝에 지은 두칸짜리 방에서 그들은 행복했다. 소 울음소리에 항상 소똥냄새가 진도하고 전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지만, 산에서 직접 나무를 해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농장은 송아지 2마리로 시작했다. 송아지가 번식할 동안 그는 15년 영농계획을 세운 뒤 해발 600m가 넘는 농장의 지리적 특성을 고려하여 억제재배를 시도한다. 집으로 가는 길가 옆에는 큰 논이 있었지만 밭채소, 약초재배 등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1978년, 서울농장은 전라북도 새마을 청소년 훈련 농장으로 지정을 받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2개월 정기과정을 연수한 훈련생 약 200여명을 배출시킨다. 또 그들이 농촌에 정착하여 자립할 수 있도록 계속 후원 지도하였고 낙농기술(외국인 데마크인 강사) 전문가들을 강사로 초청하여 전국적 규모 4회, 전북단위 3회, 군단위는 수시로 연 1,500여명에 대한 견학 및 임장교육을 실시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미맥위주 영농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개발에 눈을 돌려 양잠단지, 채소단지, 인삼재배단지 등을 조성하였고 고랭지 청정미나리 재배, 산수박재배, 억제토마토 및 오이재배 등 새작목·새기술을 보금, 농축산물 수입개방에 적극 대응했다.
이 열사는 연수생들과 모닥불을 피워놓고 밤새도록 농업의 미래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곤 했다. 김씨는 식사며, 빨래며 혼자 연수생들의 뒷바라지를 도맡아 하면서도 힘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젊은 지성과 정열을 쏟아 영농 활동과 후계자 양성에 헌신적으로 나선 부부는 활기찬 농촌을 만드는데 한 알의 밀알이 되고자 했다.
 
 
단란한 가정생활 
김백이씨는 글쓴 것을 좋아했으며 특히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 강했다. 그들은 인적이 없는 산속에서도 사랑을 속삭이며 꿈을 키웠다. 하지만 그 둘 사이를 갈라놓을 뻔한 위기가 찾아온다. 그가 에베레스트에 오르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는 1976년 첫째인 보람이가 첫 걸음마를 시작할 때쯤 농장을 떠나 설악산 양폭산장에서 훈련을 받는다. 그에게는 다시오지 않을 기회였다. 하지만 김씨는 간곡히 반대하였다. 그녀는 산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두 번이나 잃고 싶지 않았다. 이혼이라는 극한 주장을 펴면서까지 그를 막았고 그는 그런 그녀를 혼자 두고 갈 수 없었다. 결국 히말라야 행을 포기하고 시골에 남는 동안 산악인 고상돈씨와 원정대의 나머지일행은 우리나라에서 처음로 에 베레스트를 정복한다.
이 열사는 시골에 들어와 사랑하는 가족들과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그가 좋아하는 산과 생활하고자 하였다. 농권운동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 열사는 듬직한 남편이었고 자상한 아버지였다. 김씨가 어린 세딸들과 시내를 나갔다 올때면 버스가 서는 큰 길가에는 어김없이 이 열사가 마중 나와 있었다. 한손에는 김씨가 장을 봐온 짐을 대신 들고 다른 한손에는 막내를 안고 5섯 식구는 나란히 집으로 걸어갔다. 이웃에서 갑자기 젖소에 이상이 생기거나 새끼를 낳을 때면 늦은 새벽이라도 당장에 찾아가 봐주곤 하였다. 어린 세딸들은 아빠가 젓을 짤 때가 되면 소금과 설탕을 적당히 넣어 팔팔 끓인 생우유에 행복해 했다. 밭에는 젖소가 먹을 옥수수가 자라고 있었고 어린 세딸들은 옥수수 밭에서 숨바꼭질을 하며 보냈다. 방목을 했기에 초지에서 젖소를 다시 축사로 몰고 올때면 항상 이 열사 곁에는 부인과 세딸이 있었다.
산골이었기에 아이들 교육에 더 신경을 써주어야 했다. 결국 택한 방법은 시청각 교육이었다. 부부는 시간이 허락하는대로 교육프로그램을 짜 유적지를 많이 다녔고 놀이공원, 영화관도 찾았다. 호기심 많은 자식들의 질문에도 대화로서 해답을 찾아나갔다. 호기심 많은 자식들의 질문에도 대화로서 해답을 찾아나갔다. 자식은 꿈 많고 자유롭게 키워야 한다며 자연 속에서 더불어 살게 했다.
큰딸 보람은 어릴적부터 엄마를 닮아 책을 좋아했고 공부를 열심히 했다. 동생들이 아무리 괴롭혀도 화를 낼 줄 몰랐다. 보람은 학원 한 번 다니지 않고도 서울까지 올라와 숙명여자대학을 졸업한다. 둘째 고운은 남자처럼 활발하고 털털했다. 초등학교 5학년때는 20kg이나 되는 사료포대를 번쩍번쩍 잘도 날랐다. 친구들도 남자친구들이 더 잘 따랐다. 오죽하면 김씨는 "고운이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좋았을텐데..."라고 늘 얘기하곤 했다. 막내 지혜는 막내답게 애교가 많았다. 세 딸은 그 깊은 산속에서도 심심한 줄 모르며 자연과 벗 삼아 행복하게 지냈다.
김씨는 동네에서 자자할 정도로 덕성이 높은 여자였다. 긍정적인 생각과 올바른 태도에 그녀와 대화를 나눈 사람들은 금세 그녀에게 호감을 가졌다. 농사일 때문에 일꾼들이 싸온 도시락을 나눠먹는 것을 좋아했으며 사심과 욕심 없이 사람들을 대하며 공경했다. 농장의 실습생들에게 그녀는 포근한 어머니이며 누이였다. 베푸는 곳에 아끼는 것이 없었으며 어려운 사람을 보면 못 도와주어서 안타까워했다. 시내 길가에서 나물을 주섬주섬 파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머니를 보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가격 또한 깎지 않았다. 할머니들의 외롭고 어려운 형편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도시에서 태어난 그녀는 농부의 아내로서 지혜롭게 이 열사를 내조하며 가족의 화목을 이끌었다.
그의 농장 풍경은 초원의 집을 연상케 했다. 드넓은 초지는 소금을 뿌려 놓은 듯 풀 뜯는 젖소들로 채워졌고 야산에는 밤나무와 호두나무를 심어 가을에는 온 식구가 함께 밤과 호두를 따러다니기도 했다.
스위스에서 1인 시위를 벌었던 2003년 3월 그의 일기장에는 이 시절을 그리워하며 적어 놓은 글이 있다. "나도 한때는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살았는데..."
 
 
아내를 잃다 
전라북도에서 서울농장은 제일 앞서가는 선진 농장이었다. 하지만 이 열사가 1989년 전국농어민후계자연합회 회장이 되어 농권운동에 혼신을 다하고 1991년 도의원에 발을 디디게 되면서, 농장은 김씨 혼자서 꾸리게 된다. 김씨는 고장이 잦은 전기 울타리를 뛰쳐나가 다른 사람의 밭을 망쳐버리는 소를 감당하지 못했다. 이 열사가 농권운동에 깊이 빠져들수록 축사는 녹슬어 갔고 결국 막사에는 단 한 마리의 소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러던 1993년 1월 13일. 그 날 이 열사는 전주 축협도지회에서 열린 세미나와 의정활동으로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 시절 동국대학원을 다니던 부인 김씨는 마침 그날, 대학원 모임 참석차 서울에 갔다. 김씨는 평소 관심이 많았던 63빌딩 도자기 전시회를 둘러보고 이 열사를 만나기 위해 전주로 내려온다. 이 열사와 김씨는 보람이의 자취방에 들렀다가 부지런히 집으로 향했다. 부부는 막내가 집에서 혼자 기다리고 있는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바빴다.
그날은 유난히 맑았는데 저녁이 되니 갑자기 진눈개비가 휘날리기 시작했다. 9시 50분쯤, 전북 완주군 상과면 용암리 남전 주유소 앞을 지나는데 앞에서 15톤 트럭이 상향 라이트를 켜놓고 속력을 내며 달려왔다. 갑작스런 눈부심에 놀라 급브레이크를 밟다 이 열사의 차가 중앙선을 침범, 사고가 나고 만다. 그날 12살난 막내는 눈발 속에서 새벽이 되도록 오지 않는 부모님을 아무것도 모른 채 기다리고 있었다.
김씨는 안타깝게도 그 자리에서 사망한다. 이 열사는 20여일을 중환자실에서 의식불명으로 입원해 있었다. 모두들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 그를 보고 죽은 목숨이라 했다. 그가 입원해 있는 동안 지금의 노무현 대통령이 찾아와 문병을 하고 가셨다. 김상현 장영달의원 등 정계에 잇는 많은 분들이 병실을 찾았고 김대중 전대통령도 전화를 주시며 안타깝다고 하셨다. 박카스 한 통을 사들고 와, 들어오지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고 계신 분도 있었고, 병실 앞에서 기도로 쾌차를 빌어주는 분, 죽을 끓여 오신 분, 매일 출근 하다시피 하신 분들도 있었다.
이렇듯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서인지 그는 깨어났다. 하지만 이 열사의 평생 후원자이며 동반자일 것만 같았던 그의 부인은 세상을 떠났고 남겨진 것은 빚더미와 담보로 잡혀있는 농장, 그리고 철부지인 세딸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