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장준하선생 강연회
독립광복군 민주주의 운동의 불꽃 - 철원군농민회 정책실장 김용빈

[2014-03-11 오전 9:41:00]
 
 
 

지난 2월 27일 독립광복군이며 유신독재에 항거하다 39년전에 약사골 골짜기에서 의문사를 당한 장준하선생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시간이 선생의 장남 장호권씨를 모시고 철원에서 있었다 격동의 역사가 휘몰아 친 선생의 의문사 장소가 철원과 인접한 용화동 복주산 넘어 약사봉 아래 골짜기라는 것도 새삼 우리의 관심을 불러온다.

강사는 무거운 표정으로 유족으로 나서서 이렇게 말을 한다는 것이 많이 망설여졌으나 친일, 반민족 역사를 바로 규명하자는 국민적 여망에 따라 이제는 적극적으로 알리는 일에 발 벗고 나서야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었고 오늘 이 자리는 농사를 지으며 자연의 순리와 농사의 지혜를 많이 아시는 농민들 앞에서 말할 자격이 되는지 조심스럽다며 겸손한 말씀으로 이야기를 시작 하신다

 

역사를 거슬로 오르는 연어의 몸짓

일제시대는 친일 앞잡이들이 민족을 배반하였고 해방 후에는 이승만의 독재와 부정선거에 저항하여 국민들의 4,19혁명이 일어나고 장면정권이 집권을 하였으나 1년 만에 5,16군사구테타로 일제의 황군출신인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는 일이 발생했다. 그는 친일을 넘어 뼛속까지 친일DNA인자가 정권을 잡으니 일제의 잔제 용어를 사용하는데 일본의 명치유신에서 유신을 가져와 국민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이용 하였고 유신에 반대했던 선생과 대립하는 숙명적 관계가 되었다.

3년 전 장마로 파주 광탄의 천주교 공동 묘지에 있던 성생의 묘소가 훼손되어 복원 중 39년 만에 의문사로 볼 수밖에 없는 머리에 원형의 타살 흔적의 상흔이 뚜렷이 나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선생은 세상에 당신의 유골을 39년 만에 내 놓으면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가라고 생각하면서 「장준하선생 암살의혹규명 국민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검시 과정을 거쳐 지난해 6월에 타살에 의한 살인으로 밝혀 내었다. 그 과정에 묘소를 2번이나 여는 불효를 저질렀고 지난해 파주에 장준하 공원에 묘소를 단장하고 시묘 생활로 용서를 구했다고 한다.

선생은 1943년 24세에 학도병 징집에 입대를 하는데 입대전에 가족에게 일본 부대의 탈출을 결심을 말하고 탈출에 성공하면 편지에 성경 구절을 사용한다는 암시를 주고 떠났다고 한다.

쓰카다 부대에서 4명의 동지와 함께 목숨을 건 탈출에 성공하여 6천리 대장정을 하여 당시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를 찾아가서 김구등 어른들을 만나고 태극기를 처음으로 보았다고 한다.

광복군에 입대하여 대위로 있던 선생은 미군의 조선 침투 목적의 OSS부대 부대 훈련을 받고 작전으로 45년 8,17일 국내 여의도에 진입을 하였으나 아직은 무장 해제가 되지 않은 일본군과의 대치하였다가 미군의 명에 따라 철수를 하였으나 나중에 후회를 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국내에 들어 왔을 당시에 일본군과 교전을 하고 부대원이 다 죽더라도 자주독립의 교두보를 마련해야 했다고 한다고 술회를 했다고 한다.

후에 45년 26세로 점령군에 가려져 들어오고 임시정부가 개인자격으로 쓸쓸히 귀국한 후에 김구 선생의 비서로 활동을 했다. 안두희에 의해 김구 선생이 암살되는 친일 잔재에 실망하고 이승만의 정치적 압력으로 일선에서 떠나 신학 공부를 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 후 월간지 사상계를 발간하고 공산주의, 민주주의등 시대정신을 전파하여 4,19 혁명의 불꽃 역활을 하였다. 선생은 장면 정권에서 국토개발계획원 책임자를 맡아 제1기 공무원 공채를 하였고 국토건설의 인재을 양성하였으며 이때 마련된 정책과 인재가 박정희 군사테타후에 국토건설의 자원이 되었다고 한다.

 

군사독재와 친일 세력과 험난한 저항을 시작함

선생은 경제개발은 독재정권 장기화의 음모이며 허구로 보고 이 사기성을 월간지 사상계를 통해서 알리려 노력했다. 저임금, 고노동의 노동자 착취와 농촌 피박을 통해서 재벌을 형성 시키고 그 댓가로 정치자금을 받고 그 돈으로 군사독재유지를 한다고 주장하다가 구속이 되었다. 당시 이후락은 ‘떡 만지다 떡 고물 좀 먹었다 무슨 죄냐 뭐 별거냐 일본에 여자를 팔아서라도 달러를 벌어라’ 등 별 훼괴한 말을 하면서까지 경제개발 명목으로 치장을 하였다.

당시의 근로자들은 지금도 길거리에서 권리를 요구하고 있고 기득권층은 을사늑약 이후에도 권력을 유지 하였고 해방 후에도 한·일 협정을 맺음으로 권력의 독재 행위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는 군사 구테타로 정권을 찬탈한 일제의 황군 출신인 박정희의 명을 받아 김종필이 한·일 협정을 맺어는데 이는 일본천황으로부터 통치 자금을 받은 꼴이라 하고 박정희 저격후 일본의 반응을 사례로 전했다. 당시 일본의 한 신문은 ‘우리의 마지막 황군이 죽었다’ 라고 기사를 쎃는데 이는 일본이 박정희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이며 독도는 자기네 땅이라고 뻔뻔하게 떠들 수 있는 배경의 한 요인으로 본다고 한다. 한편 한·일협정으로 일본기업이 우리나라를 합법적으로 지배 하도록 했으며 그것은 일본식의 기업, 농촌운영, 사회형태의 씨스템이 우리나라 전국에 물들게 했다고 이야기 한다.

이에 선생은 유신, 즉 종신형 대통령인 총통제에 거부, 저항하다 긴급조치로 구속된 후 옥중에서 병으로 풀려나와 병치료 중 포천의 약사봉 아래 골짜기의 높은 낭떠리지 아래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이때가 유신반대 100만인 서명운동 시작을 불과 몇을 남겨 놓지 않은 때였다고 한다.

 

의문 투성인 사망 경위

 

사고 전날 함석헌선생을 방문하여 ‘시국이 위험허니 산에 가지마라, 나 다니지 말라‘는 꾸중과 함께 건강등 자유로운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다음날은 날도 무덥고 하여 등산을 하지 않고 함께하던 지인들도 집에서 쉬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선생은 예전에 잠시 알고 있었던 김용환 이라는 자의 요청에 의한 등산길에 따라 나섰고 다른 산악회에 인사만 하기로 하고 커피물과 빵을 가방에 넣고 따라 나섰다고 한다 산악회 버스에는 20여명이 있었다고 하나 그들 중 지금껏 나타나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당시 김용환은 장준하선생의 사고 현장에 있었다고 증언을 하고 있으나 그동안 수차례 증언 내용을 번복 하였으며 중정요원으로 민간 스파이로 밝혀지고 있다고 한다. 발견된 시신의 상태가 온전하여 실족에 의한 사망이 아니며 사고 지점이 절벽이 아니고 인근의 다른 지점에서 이미 당한 후 옮겨졌다고 본다고 한다. 사고 당시 돈두렁에 누군가 쓰러져 있었다고 본 주민의 아들이 있다고도 한다. 살해 주최는 인근 특수임무수행부대로 보이며 그 부대책임자는 당시 전두환이 였다고 한다.

 

약사봉 아래 골짜기에서 호권씨는 아버지를 들쳐업고 하산하여 큰길로 나오니 여러대의 군용차들의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이는 군대와 정권의 개입을 암시하는 것이고 당시에 동행했다던 김용환은 이장 집에서 사건 신고를 했다고 하는데 나중에 이장집에서는 신고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이 되었으며 장준하 의문사 사건을 언론에서는 보도를 하지 않았고 오로지 한 사람 동아일보의 기자가 기사를 보도 했다가 구속되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고 한다.

 

의문사 규명은 꼭 이루어져야 하고 이는 장준하 선생만의 문제가 아니라 수많은 청년들의 의문사가 비일비재한데 이들 전체의 일이며 물속의 빙산이 들어나듯 밑에 깔려 있는 일들이 밝혀져야 한다고 장준하 의문사 규명의 중요성을 말한다.

 

의문사 당시 중앙정보부가 집을 둘러쌓고 가족에게는 장례를 못치를 수도 있으니 함구를 요구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집에서 주문객으로 위장하여 들어온 의사 3명이 눈으로 하는 검시-수검을 실시하여 두개골에 깊은 상흔을 확인 하였고 시신이 온전하여 낙사가 아님을 당시에 알았다고 한다. 또한 아버지를 찾아 산에서 내려오는데 한 장교가 떨어져 죽은 것 같지 않다고 귀뜸을 했으나 나중에 번복을 하였다고 한다.

 

호권씨는 묘소를 두 번씩이나 옮긴 이유는 의문사 후에 경황없이 장례를 모시는데 유족이 아닌 누군지 모르는데서 장지를 선정해 주어 장례를 치른 후 보니 자리가 너무 옹색하여 약 15일후에 근동으로 자리를 옮겨 다시 모시고 지난해에 파주시의 요청으로 파주의 통일동산 인근으로 이장을 하게 되었다는 사연을 얘기 하면서 숙연해진다. 당시 장지로 가는 중에 서대문 형무소에 1분간의 묵념도 못하게 하여 누군가 차 밑으로 목숨을 걸고 들어가서야 묵념을 할 수 있었다며 통제받았던 지난 이야기를 한다.

 

역사성, 정통성을 가진 지도자가 필요해

 

호권씨는 장준하선생은 다시 나타난 유골을 통해 아직 이 나라가 일제의 잔재에서, 독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우리에게 말한다고 한다. 그래서 자존심이 있는 나라, 바른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알고 당신의 유지를 받들어 아들인 내가 떠맡아 가야한다고 생각을 고쳐먹으니 이제는 불만이 없어지고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이 나라를 친일 군사구테타 세력이 유린해왔고 DJ와 노무현 외에는 너무 오랜 세월 이어지고 허무한 세월을 보냈다. 친일 반민족 군사구테타 세력인 그들이 지금도 국민을 일제의 식민지 국민으로 생각하고 유린하고 있다. 이제는 역사성, 정통성, 올바른 민족의식이 있는 사람이 나라를 이끌어 가야 한다. 국민들의 역사의식이 부족하여 빼앗겼다며 강조를 한다.

 

호권씨는 새정치가 필요한데 정당명부정치로 좋은 사람이 일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구체적인 의사를 말하기도 한다. 그는 진실은 알리고 역사는 바로서야 한다 그리고 국민이 깨어나고 바로 판단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활동을 해야 한다고 한다.

이 날도 다른 지역 두 곳에도 행사가 있다며 인사도 충분히 나누지 못하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생생한 증언속에 질문이 계속 이어질 것 같은데 아쉬움으로 정리를 하고 바쁜 시간을 잠시 붙들고 기념 사진 한 장을 남기고 걸음을 재촉하여 다음의 장소를 찾아 떠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