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의 시간이 오고 있다
[기고] 이중기(시인)   한국농정신문 2011,11,28
2011년 11월 28일 (월) 09:27:40 이중기(시인) webmaster@ikp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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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란 무엇인가? 부당한 것에 맞서 싸울 줄을 알아야 하는, 시대의 거울 같은 존재들이 아닌가? 하지만 무릇 작가란, 글 속에서 분노를 감출 줄 알아야 한다. 저 암울했던 80년대를 풍미한 민중문학 시대를 관통한 뒤에 나온 말이다. 그렇다면 모름지기 시인인 나도 은유와 상징으로 또는 풍자와 해학으로 분노를 행간에 감춰야겠지만, 현실정치가 자꾸 내게 격문을 쓰라고 치근덕거린다.

씨바노므새끼드! 이 말은 내가 지난 22일 오후 5시 무렵에 벌거벗은 채로 씹어뱉은 한탄이었다. 그 시간, 나는 목욕탕에 있었고, 탕에서 나와 옷장을 여는데 휴대전화가 진저리를 치는 것이었다. 영천농민회가 국회상황을 타전한 문자. “한미자유무역협정, 한나라당 날치기 강행처리!!!” 이번에는 내가 진저리를 쳤다. 재빨리 텔레비전을 쳐다보았으나 화면에는 천박한 사랑놀이가 한창이었다. 불알을 덜렁거리며 달려가 채널을 돌리자 머리와 앞가슴에 최루탄분말을 뒤집어쓴 민주노동당 김선동 의원의 일그러진 표정이 내 면상을 후려갈겼다. 아찔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한 마디, 씹어뱉었다. 씨바노므새끼드! 그리고 반복되는 풍경과 풍경들의 클로즈업. 김선동 의원의 ‘국회 테러’가 아니라 불의에 항거하는 ‘약자의 자폭’으로 머릿속에 각인되면서 덜컥, 눈물이 쏟아졌다. 짐승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김선동 의원이 국회를 테러했다고? 이 말을 맞받아 쳐야 하는 내게 논리 따윈 필요 없다. 단세포적으로 말한다면 꼴값하네다. 내 눈에는 주구장창 국격(國格)을 따지면서 뒷전에선 불륜이나 저지르는 한나라당이 김선동 의원에게 최루탄분말을 퍼부은 것으로 비쳐졌다. 아니다. 그것은 한나라당이 이 땅의 약자인 민중들에게 가한, 잔인무도한, 테러였다. 기자들 출입조차 봉쇄하여 국민의 알권리까지 뭉개버린 짓거리를 한번 돌아봐라. 그렇게 날치기로 국민들을 무장해제 시켜버린 친미주의자들의 짓거리를. 그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천박한 나라 미국과 불륜을 저지르고 싶어 안달이다. 이제는 빛바랜 대중잡지의 표지모델 같은 칼라 힐스와 함께 시작된 불장난은 이명박 정권에서 뜨겁게 타오르고 말았다. 그래서 이 망측한 사건은 희대의 불륜 스캔들로 길이 남을 것이다.

그 무슨 망나니짓이냐고? 예로부터 약자들은, 하다가 또 하다가 안 되면 최후의 수단으로 자해하고, 자폭을 한다. 수많은 노동자 농민들이 목을 매고, 농약병을 물고 엎어져갔지 않았는가. 노무현 정권 실정의 결정판이라고 볼 수 있는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 그것을 절망적으로 재협상해버린 이명박 정권의 실정 때문에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민중들을 죽음의 도가니로 몰아넣을지는 한낱 무지렁이 농사꾼인 내 눈에도 훤히 보인다.

날치기에 앞서 ‘할 만큼 했다’고 한나라당은 말했다. 최선을 다했다고? 마당은 비뚤어져도 장구는 바로 치자. ‘투자자-국가 직접소송제’의 독소조항은 협상 초기부터 제기되어 왔지만 소수의 전문가와 시민단체만 알고 있었지 국민들은 너무나 모르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그땐 몰랐다”고 해서 한나라당에게 십자포화를 맞은 정동영 의원의 말에 가소롭지만 공감한다. 대선 후보조차 알 수 없도록 철저히 베일 뒤에 감추어버린 ‘독소조항’ 아니었던가. 협정문 공개를 거부했고, 공개된 협정문 번역 오류가 296건이나 되었을 정도로 이 나라 행정부가 한 일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였다. 올가을 들어서야 국회에서 소위 ‘끝장토론’을 벌이는 가운데 그 독성이 너무나 강력하다는 걸 국민들은 비로소 알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자 정부와 한나라당은 ‘관제학자’와 ‘관제전문가’를 동원해서 독소조항의 폐해를 덮으려고 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미래에 다가올 재앙은 대비해야 한다고 말하는 반대론자에게 그렇게 ‘예단’하는 것 자체가 ‘반대를 위한 반대’라며 일축해버렸고, ‘괴담 제조기’로 깔아뭉갰고, 협박을 했다. 그리고는 대통령이 국회를 방문하는 것으로 최후통첩을 보냈다.

한때, 농사꾼들 술자리에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먼저 없어져야 할 조직이 뭐냐는 우스개 질문이 있었다. 정답은 ‘전농.’ 왜? 맨날 데모만 하니까. 농촌에 비로소 평화로운 날이 온다면 자연 ‘전농’은 사라지게 되니까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그러나 얼마나 자조적인 표현인가. 그런 의미에서 한나라당은 하루라도 빨리, 제발, 없어져야 할 정당이다. 왜? 맨날 날치기만 하니까. 날치기는 테러니까.
 글. 이 중 기 (시인·경북 영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