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ss 아이콘 이미지

8.15에 대한 세 가지 질문

불철주야 2012/08/15 08:30 Posted by 동북아의 붉은_달

일본의 정식항복은 9월 2일 미주리호 선상에서 이뤄졌다. 그리고 9월 8일 미 24군단이 인천에 상륙해 다음날 일본군의 항복을 받고 조선총독부의 일장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올렸다. 미군은 아베 총독을 포함해 총독부의 모든 일본인에게 종래의 기능과 업무를 계속할 것을 명령했다. 8월 15일부터 9월 8일까지 조선 내 일본인 경찰의 90%가 직장을 지켰다고 한다.


8.15에 대한 세 가지 질문


동북아의 문
http://namoon.tistory.com


오늘은 광복 67주년 되는 날이다.


해방 전후 한반도 역사는 몹시 복잡하여 8.15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반공반북과 친미친일만이 허용되는 한국 사회에서 8.15의 진실을 파헤치려는 시도는 자칫 비난과 탄압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과거 역사를 정확히 알아야 현재를 올바로 볼 수 있고 미래를 개척할 수 있다.




이에 8.15에 대한 세 가지 질문을 통해 8.15의 정확한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일본은 8월 15일에 주권을 넘겨주었는가.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하였다. 일본이 항복을 선언했으므로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은 자연히 해방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태는 그리 간단치 않았다.


일본의 패전은 이미 기정사실이었고 8월 15일 정오 일본 왕의 항복 방송이 있기 전인 당일 아침에 여운형은 엔도 류사쿠 조선총독부 정무총감과 교섭을 벌여 ▲정치범, 경제범을 즉시 석방할 것 ▲3개월 분 식량을 확보할 것 ▲치안 유지와 건국 운동을 위한 정치 운동에 대하여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 ▲학생과 청년을 조직, 훈련하는 데 대하여 간섭하지 말 것 ▲노동자와 농민을 건국 사업에 동원하는 데 대하여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 등 5개 항의 요구를 관철했다.



▲연설 중인 몽양 여운형 선생


그런데 3일 후인 18일, 아베 총독은 느닷없이 행정권 이양을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정식 항복이 이루어질 때까지 조선총독부가 행정권을 유지하도록 미국이 명령한 것이다. 20일에는 맥아더 미 태평양지구 사령관이 아베 총독에게 한국의 치안유지를 책임지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한국인의 모든 정치 및 치안유지 단체의 해산을 명령했다. 실제로 한국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은 시내를 돌아다니며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하였고, 심지어 비행기를 동원해 경거망동을 삼가라는 삐라를 뿌리기도 하였다.


일본의 정식항복은 9월 2일 도쿄만 연안의 미주리호 선상에서 일본 정부 대표와 대본영 대표, 그리고 연합국 8개국의 대표 사이에 조인되었다. 이날 한국 주둔 일본군 사령부는 미군에게 책임 인계시까지 38선 이남지역 치안을 담당하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일본 경찰의 90%가 미군이 상륙할 때까지 직장을 지켰다고 한다.



▲미주리호에서 항복 서명하는 일본군


마침내 9월 8일 미 24군단이 인천에 상륙했다. 미군은 여운형 등의 면담 요청을 거부하고 일본인들의 안내를 받으며 상륙을 마쳤다. 다음날인 9일 미군은 38선 이남 주둔 일본군의 항복을 정식으로 받고 조선총독부의 일장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올렸다. 미군은 아베 총독을 포함해 총독부의 모든 일본인에게 종래의 기능과 업무를 계속할 것을 명령했다.


이틀 후인 11일에야 미 24군단 사령관 하지(John Reed Hodge)는 조선총독부를 미군정청으로 정식 개칭하고 아베 총독을 해임했으며 미군정 시정방침을 발표했다. 다음날 미군정 장관에 아놀드(Archibold. V. Arnold) 소장이 취임했다.


맥아더 사령관은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기 전날인 9월 7일 <조선인민에게 고함>이란 포고를 발표했다. 이 포고문의 주요 내용은 ≪본인이 지휘하는 승전군은 오늘 북위 38도선 이남의 조선 영토를 점령한다≫, ≪모든 주민은 본관 및 본관의 권한 하에서 발표한 일체의 명령에 즉각 복종하여야한다≫ 등이다.


이상을 종합해보자.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고 조선총독부가 여운형에게 행정권을 이양하면서 38선 이남은 해방을 맞이했다. 그러나 미군의 명령으로 행정권 이양이 취소되고 해방은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미군은 조선총독부에게서 전권을 이양 받고 군정을 실시했다. 1945년 8월 15일의 기쁨은 조선총독부 건물의 일장기가 성조기로 바뀌는 순간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후 미군의 지원 아래 이승만 대통령이 단독정부를 세우면서 한국의 역사는 끝없는 질곡에 빠지고 말았다.



▲총독부에 걸린 성조기


둘째, 핵폭격이 전쟁의 승패를 갈랐는가.


지금도 상당수의 사람들은 미국이 핵폭격을 해서 일본이 항복했고 우리는 해방을 맞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국의 핵폭격은 그렇게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1945년 2월 11일 얄타회담에서 미국은 일본의 저항으로 인한 막대한 피해를 줄이고자 소련(지금의 러시아)의 참전을 요청했다. 당시 미국은 단독으로 관동군과 대결할 경우 1년 이상 전쟁을 해야 하며 100만 명 이상의 미군이 희생될 것으로 판단했다. 그런데 그 때 소련은 유럽전선에서 독일과 전쟁 중이었다. 따라서 소련은 독일 항복 3개월 후에 대일전쟁에 참전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얄타회담


그런데 얼마 후 트루먼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미국의 입장이 급격히 변화하였다. 전후 세계 패권을 홀로 쥐기 위해 소련과 대립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독일 패망 후 일본의 전력은 급격히 무너졌으며 때마침 핵폭탄 실험까지 성공하자 미국은 소련에게 참전을 요청한 걸 후회하게 되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고 약속한 3개월이 다가오면서 소련 참전은 초읽기에 들어갔다. 결국 미국은 혼자 힘으로 일본을 굴복시켜 소련의 지분을 줄이기 위해 8월 6일 아침 히로시마에 핵폭탄을 투하하였다. 소련 역시 약속대로 8월 8일 심야에 일본을 향해 선전포고를 하고 다음날 새벽, 일제 진격을 개시했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핵폭탄


한편 일본은 패배가 불가피하다는 걸 오래전에 깨닫고 있었지만 왕정을 유지하는 <명예로운 패전>을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 선언을 거부하고 있었다. 일부 관료들과 장교들은 핵폭격을 당한 후에도 이런 입장을 지속했다. 그런데 소련군이 참전 후 첫 교전에서 관동군에게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혔고 하루 평균 100km의 속도로 만주를 석권하자 일본 정부는 충격에 빠졌다.


원래 일본은 <대동아 공영권>을 명분으로 전쟁을 일으켰으며 핵심은 중국대륙에 진출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일본의 주력은 만주를 침공한 관동군이었다. 그런데 일본이 자랑하는 백만 관동군이 속수무책 무너지자 일본 정부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결국 8월 10일 일본 정부는 ≪천황의 국가통치의 대권에 변경을 가하는 요구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이해 하에≫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는 제의를 하였다. 이에 대해 번즈(James F. Byrnes) 미 국무장관은 ≪항복할 때부터 천황 및 일본 정부의 국가통치의 권한은 ...(중략)... 연합국 최고지휘관에게 종속하는 것으로 한다≫고 통고했다. 미국이 일본의 왕정을 인정해줄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일본은 8월 14일 어전회의에서 무조건 항복을 결정하였다.


미국은 일본을 통해 소련을 견제하고 중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가져갈 속셈으로 일본의 왕정체제를 인정해 주었다. 이는 이후 전범 처리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나 일본 왕은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 만약 미국이 일본의 왕정을 부정하고 끝까지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면 일본 전역은 심각한 혼란에 빠지고 일본을 통해 소련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구상도 깨졌을 것이다.



▲특A급 전범 히로히토 일왕


이처럼 미국의 핵폭격은 일본의 패망에 큰 영향을 주었으나 결정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핵폭격 이전에도 이미 일본의 패망은 기정사실이었고 일본의 주력인 관동군은 실제로 소련군과의 전투에서 무너졌기 때문이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8월 15일에도 한반도에 가장 가까이 진격한 미군은 한반도에서 1000km나 떨어진 오키나와에 있었다. 오키나와 상륙작전에서 참가병력의 35%를 잃어버린 미군은 규슈(九州)에 11월 초에나 상륙할 작정을 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소련군과 조선인 항일부대는 이미 38선 이남까지 남하한 상태였다.


이렇게 볼 때 전쟁 승리 보다는 소련을 견제하고 전후 세계 질서에서 자신의 주도력을 확보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로 미국이 핵폭격을 감행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셋째, 미국이 우리를 해방시켜 주었는가.


한국 사회에는 미국을 은인으로 생각하는 풍조가 강하다. 일본을 몰아낸 은인이요, 북한의 침략을 막아낸 은인이라는 것이다. 이 글은 8.15에 대한 글이므로 전자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일본 패망에 미군도 상당한 역할을 했으나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미국이 일본을 몰아냈으니 우리 은인이라는 단순 논리가 만연하는 이유는 한국을 친미 국가로 만들어 자신들의 군사기지로 활용하면서 소련(지금은 러시아)과 중국, 북한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의도 때문이다.


사실 일본은 전쟁 막바지에 50여개 나라와 전쟁을 하고 있었다. 또한 수많은 조선인들도 일본에 대항해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런데도 일본 패망의 공을 고스란히 미국에게 바치는 건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다. 유럽의 많은 나라들도 독일, 이탈리아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했지만 남의 나라를 은인으로 모시지는 않는다.



▲독립군


미국은 38선 이남에 주둔한 일본군을 무장해제한다는 명분을 가지고 이 땅에 상륙했다. 그러나 정작 만주나 한반도에 있던 일본군과 지배세력들은 아무 탈 없이 하루빨리 본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기 때문에 다른 누가 무장해제를 해줄 필요가 없었다. 정무총감 엔도도 여운형에게 일본인들이 무사히 귀환할 수 있도록 치안을 유지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를 막은 것은 오히려 미국이다.


해방 후 지체 없이 건국준비위원회가 꾸려지고 전국 각지에 인민위원회가 건설된 것만 봐도 우리 민족이 독립준비를 내실 있게 하였고 미군의 도움 없이도 자주독립 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단 보름 만에 전국에 걸쳐 145개의 건준지부가 탄생했고 그 산하에 162개의 지방치안대를 둘 정도였다.


1945년 9월 8일 인천에 상륙하는 미군을 환영하러 나간 권평근 조선노조 인천중앙위원회 위원장과 다른 한 명이 경찰의 통제선을 넘었다며 일본경찰이 쏜 총에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군은 재판을 통해 일본경찰이 총을 쏜 것이 정당했다고 판결했다. 미군이 결코 한국인을 위해 이 땅에 진주한 게 아님을 드러낸 사건이다.


미국은 자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세우기 위해 38선 이남에 진주했고 결국 분단까지 저질렀다. 그리고 지금도 한국 사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각종 전략적 이익을 챙기고 있다. 67년이 지난 지금도 비극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2012.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