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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는 명장이었다

태봉국의 역사 재조명

    [철원신문 : 2011,12,29] 김 용 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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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에서는 궁예-태봉학술 관련 행사를 10년째 해오고 있으며 올해는 고석정에서 지난 23일 오후에 제3회 태봉학술 세미나가 열렸다. 이번에도 여느때와 마찬 가지로 객석을 가득 채우는 열기로 가득했고 신철원고에서는 학생들이 단체로 관람을 하기도 하였다.

행사초창기에는 잊혀진 역사를 찾아내고 승자에 의해 폭군으로 기록된 궁예의 왜곡된 내용을 바로잡는 노력이 많았다. 그 동안 행사가 진행이 되면서 궁예도성(태봉국호를 칭하는 태봉도성이 맞다는 의견을 참고하여 이후는 태봉도성으로 명칭을 하고자 한다)의 남북공동 발굴조사 요구, 일제의 만행으로 태봉도성 가운데로 경원선 철길을 관통시킨 만행의 지적, 월하리의 왕건의 사적지 발굴조사, 방송국의 역사드라마등 여러 계기와 내용들이 새롭게 제기되어 왔다. 이번 세미나는 방송국의 역사 스페셜 ‘궁예는 폭군이었나?’ 의 상영으로 시작 되었는데 고려가 왕건과 개성의 집권시기 전남 강진의 무위사 경내에 세운 선각 대사비에서 대왕(大王)으로 표기된 주인공이 궁예라는 해석을 하면서 나주 전투에서 직접군대를 지휘하고 함락시킨 주역으로 궁예의 행적을 찾아 내었다 이것은 궁예가 초기에는 고려에서 배척을 당하지 않았으나 후에 김부식에 의해 쓰여진 삼국사기에서 승자의 기록으로 왜곡되었다는 해석이 가능하게 한다 연계해서 볼때 토론에서 고려초기인 당시에는 인정받는 선왕(?)의 지위가 있었다고도 재해석을 하는 주장이 새롭게 나왔다 또한 고려초기-선종전까지 태봉의 국가 제도가 계승되었다는 사실로 태봉과 고려가 완전히 단절되지 않았었다는 사실이 한 번 더 입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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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에서는 세 가지의 주제 발표가 있었는데 첫 번째 발제자(최연신:목포대 사학과 교수)는 궁예가 성업을 이루던 후고구려 시기에는 미륵과 불교의 화엄종, 선종의 사회적 영향의 흐름이 있던 시기로 미륵을 신비사상으로 보거나 비하하여 낮추어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한다

두 번째 발제자(장득진:국사편찬위원회 편사 연구관)는 왕건을 다룬 드라마에서 궁예를 너무나 부정적으로 다루어서 전국민들에게 잘못된 인식이 심어져 있는데 철원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태봉의 역사를 바로 세우고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문을 하기도 했다 역사는 기록인데 전국의 수십만 학생이 공부하고 시험에도 출제되는 역사교과서의 파급력은 대단히 크므로 교과서의 궁예 관련 내용 개정과 지면 확보에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한다. 또한 교과서의 내용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학계의 공인이 밑받침 되어야 하는데 가칭 궁예-태봉 관련 학회를 설립하여 학문적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고 제시를 했다. 궁예를 바로 알리기 위해서는 해상왕 장보의 사례를 들기도 했는데 예전에는 장보고는 단순히 신라에서 배척 당한 사람이라고 알려 졌으나 지역 연고의 사조사장과 지자체의 노력으로 역사 드라마가 제작되고 지금의 해상왕 장보고가 있을 수 있었다고 한다

세 번째 발제자 (이 재 :국방문화재연구원 원장)는 비무장지대 안의 궁예도성을 답사한 경험이 있는데 천년의 세월 속에 많이 훼손 되었으나 형태는 남아 있었다고 한다

궁예도성의 둘레가 4각의 장방형으로 된 것은 평야 지대의 특성에 기인한 것이며 당의 장안성, 발해의 상경용천부의 동경성 구조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은 것으로 보는데 이들 궁성은 동서 또는 남북 방향의 장방향으로 놓였으며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성내의 도로 구조도 장방형 구조로 이루고 있으며 규모가 국내의 다른 도성보다도 큰 것인데 이는 당시 태봉국의 큰 위세를 짐작케 하고 대륙을 향한 국가 건설의 포부를 엿 볼 수 있다고 한다

주제에 대한 토론자는 세분 이었는데 처음 토론자는 비문의 해석에 의문을 제시하며 좀

더 객관적인 자료가 필요하다고 했으며 두 번째 토론자는 궁예-태봉-철원과 연관된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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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 지역 내용을 정리하여 역사 스토링을 만들고 걸으며 돌아 볼 수 있는 둘레길 조성도 필요하다고 했다. 궁예의 새로운 평가로는 궁예가 역사상 나쁜 사람, 악인이 아니라 신라에서 버림받은 불우한 자신의 생활환경을 용기와 도전정신으로 극복하고 전쟁에서는 탁월한 능력을 보인 명장으로 활약하고 후삼국체제에서 후고구려의 기상을 이어받아 대동방국의 웅지를 가지고 대륙으로의 진출목표를 세우고 새로운 세상, 새로운 역사 발전에 영향을 끼친 위인으로써 자신의 꿈을 이룬 인물임을 강조하여 청소년들에게 본받을 인물로 재조명 하자는 주장도 제시 되었다 그리고 고려가 어느 날 툭 튀어 나올 수는 없는 것이고 신라가 흔들리고 후삼국시대의 혼란스런 정국을 다잡아 태봉을 세울 수 있었기에 고려의 건국이 가능했다는 주장도 한다. 세 번째 토론자는 철원이 지정학적, 역사학적 한반도의 중심으로 그리고 태봉과 병자호란, 6,25(한국전쟁)시에도 중심지에 있었고 한반도의 중심인 철원이 문화적 중심지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한편 궁예가 제일 천대 받는 곳이 철원이라고 궁예-태봉관련 유적조사가 필요하고 관련행사로 전국궁도대회, 도피안사의 팔관회나 위령법회, 불교 강연회, 기념행사, 기념관, 야외전시장등을 조성이 필요 하다고 군청에 제안을 하기도 했다

고석정 행사장 입구에는 궁예와 관련된 유적지등의 사진이 전시 되었는데 사진에는 철원과 가까운 포천을 비롯한 전국 각지의 산성, 사찰등 궁예와 연관된 귀중한 자료가 여러점 전시 되어 관심을 끌고 있었다

정리되는 시간에 궁예 관련 학술행사 초창기에 참여하신 분이라고 소개를 받은 강원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강원도에 이런 왕도의 역사가 있다는 것에 자랑스러움을 느낀다며 궁예는 우리나라의 수백 명의 왕 중에 가장 특이 하면서 정말로 왕다운 왕 노릇을 했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자체적인 국호를 정하였고 자체적인 연호를 3개나 가진 나라였다 그리고 태봉이라는 나라의 궁예는 중국의 대륙을 내다보는 꿈과 목표가 있었다는 말씀도 했다

행사가 끝난 후 저녁 식사 시간의 건배사 중에 옛 명성을 되찾아 한반도의 중심이 되고 동북아 허부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는 말씀은 귀를 번쩍 뜨이게 했다

세미나를 지켜보며 통일 중심지의 역할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철원은 과거에 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 한반도의 중심이었는데 철원이 앞으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통일의 시대가 오면 남북은 국가 명칭, 국기 사용, 새로운 수도 지정등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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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수도는 서울과 평양중에 한 곳을 하기에는 서로가 용납 하기 어려울 것이고 서울과 평양의 중간지점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 할 수도 있다. 만일 그럴 경우 예상되는 지역은 개성, 판문점, 철원등이 유력 할 것이고 남과 북의 주민들이 제일 많이 호응 하는 지역으로 합의가 모아지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남북의 호응을 동시에 많이 받기 위해서는 대국적인 견지에서 남과 북이 소통하는 장이 되고 물류의 전진기지가 되고 남북의 긴장해소와 평화 분위기 조성에 앞장서야 이후에 철원의 역할을 인정받고 국민들의 인식 속에 통일하면 철원이 떠 오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금부터 한가지씩 생태와 평화의 중심지가 되도록 노력을 하고 화해와 협력을 논하는 자리로 통일의 새싹이 피어나는 공간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