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괴에 총칼을”…전방지역 ‘냉전깃발’ 요란
등록 : 20110627 20:15 | 수정 : 20110628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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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회귀’ 철원부대
천안함·연평도 사태 뒤 군부대 간판·담벼락에 ‘자극적 구호’ 펼침막…주민들 “섬뜩”

» 지난 23일 오후 강원도 철원군 서면 백골부대(3사단) 들머리의 펼침막(사진 위)과 담벼락에 호전적이고 자극적인 구호들이 보이고 있다. 철원/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중부지방에 장마가 밀어닥친 지난 23일 오후 강원도 철원의 한 지방도로. 거친 비바람에 휘청거리는 벼들 너머로 회색빛 군부대 울타리가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빨간색 페인트로 쓰인 격렬한 글귀가 눈에 또렷이 들어왔다.

‘쳐부수자 북괴군, 때려잡자 김父子(부자)’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 약! 약!’

‘부관참시 김일성, 능지처참 김정일·정은’

‘북괴군의 가슴에 총알을 박자’

동행했던 김용빈 철원군 농민회장이 담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처음에 주민들이 이것 보고 깜짝깜짝 놀랐지. 외지인들도 ‘섬뜩하다. 이게 뭐냐’고 하고…. 부대 쪽에도 얘기했는데 ‘전임 사단장이 해놓은 일인데 바꿀 생각 없다’고 말하더라.”

남북 사이에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면서 일부 전방지역의 분위기도 1960~70년대로 회귀하고 있다. 일부 부대에서 장병 정신교육을 내세워 냉전시대에나 볼 수 있던 호전적이고 자극적인 구호와 표어를 내건 것이다. 사실상 민간인들을 상대로 원색적인 증오를 조장하는 ‘효과’도 있어, 지역사회에서 논란이 일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강원도 철원의 백골부대(3사단)다. 이 부대는 도로 곳곳에 있는 부대 안내 간판마다 ‘북괴군의 가슴팍에 총칼을 박자!’는 글귀를 새겼고, 부대 담벼락 바깥쪽에 김일성 3부자를 부관참시(숨진 사람을 묘에서 꺼내 참수하는 형벌), 능지처참(사지와 머리를 잘라내어 죽이는 형벌)하자는 등의 구호를 써넣었다. 대전차 방호벽(유사시 벽의 밑부분에 폭약을 폭발시켜 전차의 진행을 막는 장애물)에는 북한을 멸망시키자는 뜻의 ‘멸북’이란 글귀를 새겨놓았다.





이양수 철원군 의원은 “천안함·연평도 사태로 가뜩이나 장병 가족들의 불안이 큰데, 면회를 왔다가 이런 구호들을 보고 걱정을 더욱 키워서 간다”며 “전임 사단장에게 이런 점들을 얘기했으나 ‘장병 정신교육에 필요하다’며 철회할 뜻이 없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전방지역이 이런 살풍경으로 바뀐 계기는 지난해 발생한 천안함·연평도 사태다. 군 안에서 ‘북에 원통하게 당했다’는 정서가 확산되면서 독기가 올랐다는 것이다. 백골부대 말고도 상당수 부대가 영내 또는 위병소 근처에 호전적인 구호를 내걸었다. 철원 가는 길에 들른 경기도 포천의 한 부대 입구에도 ‘때려잡자 김부자’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논란이 됐던 ‘김일성 3부자 표적지 사건’도 맥락이 비슷하다.

서울에서 철원으로 출퇴근한다는 한 시민은 “짖는 개는 잘 물지 않는다는 옛말이 있다. 와신상담을 하려면 상대방 모르게 조용히 실력을 길러야지, 북한이나 하는 이런 유치한 짓을 왜 따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백골부대장으로 있을 당시 이런 구호들을 내걸도록 한 신원식 소장(현 국방부 정책기획관)은 “김정일 정권은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게 전투부대 사단장으로서 내 생각이었다”며 “회의를 시작할 때도, 식사를 하기 전에도 ‘부관참시 김일성, 능지처참 김정일·김정은’ 등의 구호를 외치게 했다. 다시 전투 사단장이 되더라도 똑같이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육군본부는 “장병 정신전력 강화를 위한 조처이지만, 주민들에게 의도하지 않은 피해를 준다면 없앨지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철원/이순혁 기자 hyu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