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창원 “진보에 나라 못맡긴다?…가짜 보수”

경향신문 | 유인경 선임기자 | 입력 2013.01.05 16:20 | 수정 2013.01.05 16:26
·"난 정정당당한 보수주의자. 진보에 나라 못 맡기겠다고 하는 이들은 가짜 보수"

·"나는 지독한 정치혐오자여서 정치에 몸담을 생각은 없다"

지난 3일, 경찰은 지난 대선 때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를 비방하는 인터넷 댓글을 달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국정원 여직원이 타인이 쓴 선거 관련한 글에 일정한 패턴으로 추천과 반대 의사를 표시한 경우가 100여건 발견되었다고 밝히며 피의자 신분으로 재소환하겠다고 했다. 대선후보 3차 토론회가 끝난 직후인 지난해 12월 16일 밤 11시쯤 돌연 국정원 여직원 의혹과 관련해 "하드디스크를 분석한 결과 혐의점을 찾을 수 없었다"는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한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당시 경찰대 교수였던 표창원씨(47)는 그 사건과 관련, "경찰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고 아직 뭔가 나온 게 아닌데 왜 이 시점에서 발표를 했느냐"고 비판하고 나섰다.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범죄수사학자이자 보수주의를 자처하던 그의 주장에 국정원 여직원 사건은 대선의 또 다른 핫이슈로 떠올랐다. 결국 "왜 완벽한 증거도 없는데 어린 국정원 여직원을 집에 '감금'하고 어머니가 찾아가도 못만나게 했느냐"며 감성에 호소한 새누리당과 그 후보인 박근혜씨는 대통령에 당선됐다. 반면 "국정원 여직원은 스스로 문을 잠근 '잠금'이지 감금은 아니며, 경찰은 대선에 큰 영향을 미칠 사건이니 즉각 진입했어야 했다"고 논리적 주장을 했던 표창원씨는 경찰대학 교수직을 사직하고 교수가 아닌 백수가 됐다.

체감온도 영하 20도라는 엄동설한에 가뜩이나 마음까지 시릴 '초보 백수' 표창원씨를 만났다. 혹시 우울증에 시달릴까 걱정했는데, 그는 각종 매체의 인터뷰와 모임 등 평소보다 더 바빠 인터뷰 시간 잡기도 어려웠다.

경찰이 국정원 여직원이 불법선거운동에 관여한 단서를 포착했다고 인정했다.


"아직 최종 수사 결과가 나온 것은 아니라서 뭐라 단언할 수는 없다. 대선을 눈앞에 두고 국가 최고의 정예 정보기관의 직원이 하루에 두세 시간 이외에는 오피스텔에 계속 머물면서 비방댓글을 유포했다는 의심이 간다는 제보·첩보라면 당연히 진입 내지는 단속을 해야 했다. 그 사건의 법적 근거는 공직선거법에 나와 있는 '공무원에 의한 선거부정', '국정원 직원의 정치개입 금지'(국정원법), '경찰관 직무집행법' 등인데 그게 지켜지지 않았음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동안 각종 정치권과 관련돼 경찰의 위신이 추락한 사건이 많았는데, 왜 국정원 여직원 의혹사건에 교수직까지 버릴 정도로 집착했나.


"그냥 내 마음이 움직였다. 모든 역사적 사건에는 우연이 작용한다. 이 사건은 이미 가득찬 물잔을 넘치게 한 마지막 물 한 방울이라고나 할까. 사실 선거과정에 참여할 의사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 경찰서 여성 수사과장이 그 여직원 오피스텔 문앞에서 '문 열어 주세요'라고 애걸하듯 말하는 장면을 보는 순간, 이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경찰 공권력이 실추된 현실을 목격하고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목소리를 내기로 결심했다. 국민적 의혹을 받고 있는 이 사건의 경찰 수사에 대해 당시에 확실히 문제가 있다고 판단, 경찰의 자존심을 걸고 주장한 것이었다."

교수직은 잃었지만 '힐링전도사' '상남자' '표창스타일' 등 많은 애칭을 얻었다.


"내게 주어진 새로운 직함, 새로운 역할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사람들이 내게 긍정적 기대감을 갖는 것 같아 기쁘면서도 어깨가 무겁기도 하다. 뭐 칭찬의 이야기만 나오는 게 아니라 '보수의 탈을 쓴 빨갱이'란 욕도 듣는다."

대선 직후 프리허그가 화제가 됐다. 그토록 사람들이 많이 모일 줄 알았나.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광주에서는 3000여명이 참여했다. 서울도 광화문, 강남, 대학로에서 500여명 정도였다. 그 정도로 많은 분들이 나를 보러 오실 줄 몰랐다. 박 대표를 지지하지 않은 48%의 국민에게 치유와 위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대선 관계자들이 다들 멘붕 상태여서 나라도 나서야겠다고 느꼈다. 치유해주겠다고 나섰지만 내가 치유받았다. 특히 광주는 감동·감격·감사 그 자체였다. 나를 껴안고 울던 50대 아저씨, 감사하다고 말한 소녀들…. 평생 못잊을 것 같다."

경찰대 교수에 냉철한 프로파일러, 특히 경상도 출신의 마초남성이라면 누군가 껴안아주는 일은 어색하지 않은가.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 뉴스나 방송 등에서 범죄에 관련한 사건을 날카롭게 평하는 모습을 보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의 또 다른 일은 사회적 약자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이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이들, 범죄 피해자들 등 범죄의 뿌리에 시달리는 이들을 항상 다독거리고 안아줬다. 나쁜 이들에게는 악마처럼 무섭고, 선한 이들에게는 솜털처럼 부드럽자는 것이 나의 신조다."

백수가 되어 걱정하는 이들이 많다. 생계도 그렇고 유난히 많은 일을 하던 사람이 갑자기 일을 놓으면 허탈할텐데..


"내가 백수라고 주장하니 진짜 백수들 중에 화내는 이들도 있더라.(웃음) 경찰대 교수가 고소득자가 아니어서 경제생활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것 같다. CBS 라디오 < 김미화의 유 > 에서 한 코너를 진행하고, 경향신문과 무비위크 등에 격주, 혹은 3주에 한 번 고정 칼럼을 연재한다. < 추적 사각지대 > 란 케이블방송 프로그램의 진행은 계속하고 있고 다른 방송에서도 고정프로 요청이 들어온다."

그런데 꼭 교수직까지 던져야 했나. 교수직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이 얼마나 지난하며. 더구나 안정된 국립대학 교수인데…. 나를 비롯해 보통 직장인들도 고정된 월급은 물론 알량한 보험혜택 때문에라도 사표를 가슴에만 품는 이들에게는 충격적이었다.


"경찰대학 교수는 공무원 신분이라 자유롭게 정치적 발언을 하기 어렵다. 교수직을 던진 것은 용기와 희생이 아닌 선택이다. 민주화 과정에서 직장만이 아니라 가족, 건강, 심지어 생명까지 모든 것을 잃은 분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난 그저 교수란 타이틀과 안정성을 포기했을 뿐이라 부끄럽다."

그런데 한 매체의 여론조사를 보니 국민의 70%가 박근혜 당선인이 앞으로 국정을 잘 수행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것은 박근혜 당선인에 대한 기대라기보다 우리 사회 역량에 대한 기대라고 본다. 이제 우리 국민들은 성숙했고 어떤 정치적 상황에도 쉽게 휘둘리지 않는다는 자기 확신을 얻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만큼 지켜보니 국민을 무서워할 줄 알고 잘 하라는 채찍의 의미일 게다. 예전처럼 한 명의 독재자에게 모든 것을 의존하던 시대는 갔다. 당선인이 민심을 잘 들어주고 정책의 방향을 잘 짚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바른 정치를 하기 바란다. 다만 우려도 크다. 당선인보다 주변인들, 특히 권력 추종자들에 의해 농간과 비리가 생길 위험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깨어 있는 국민이 항상 주시해야 한다."

아직도 본인이 보수주의자란 주장에 변함없나.


"그렇다. 난 정정당당한 보수주의자다. 보수의 가치는 자유와 정의로움이다. 그런데 과거지향적이고 정의가 아닌 이익과 이해의 관점으로 기득권을 추구한 가짜 보수주의자들 때문에 보수가 참뜻을 잃었다. 이번 사건을 통해 내가 보수주의자라고 주장하며 보수에 관한 이야기를 하니까 '표 선생이 보수의 참가치와 의미를 알려준 덕분에 나의 정체성을 이제야 확인하게 해줘 고맙다'는 분들이 많았다. 자신이 진보는 아닌데 그렇다고 보수라고 하기엔 보수가 너무 답답하고 칙칙해 보수주의자라고 주장하지 않았던 이들이 의외로 많더라."

가짜 보수와 참보수의 차이가 뭔가.


"참보수는 원칙은 지키며 자유를 추구하고 받아들이는 것, 모든 규범을 정의에 두는 것이다. 우리 사회엔 보수가 다수여서 다수의 이익과 지위를 누리면서 소수의 진보에게는 절대 나라를 못맡기겠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가짜 보수다. 보수와 진보가 정정당당하게 자신들의 주장과 의견을 나누고 다름은 인정하지만 상생의 길을 찾아야 한다. 어떤 보수주의자는 '당신이 진보라면 당신 같은 진보와는 제대로 싸워보고 싶다'고도 했다. 그동안 참보수의 의미에 목말라 했던 이들이 보수의 정의와 역할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만으로도 의미있다."

칭송만큼이나 오해도 많이 받았다. 가장 뼈아픈 오해는 무엇인가.


"내 말과 행동에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보는 시선이다. 민주당과 내락, 혹은 기대를 갖고 행동을 했다는 이들이 많았다. 특히 새누리당 입장에선 내가 순수한 양심에 따라서 한 행동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엄청난 일이 아닌가. 국정원 여직원 개입이 확실하다면 부정선거인 셈이니 나의 정당성을 희석시키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일 게다. 그러니 끝없이 내가 민주당에 입당한다. 재·보궐선거에 나온다 등의 말들이 나돌았다."

최근 한 인터뷰에서 정치를 할 수도 있다고 했는데.


"대선 전에 '정권교체가 되면 일체의 임명·선출직을 맡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 정권교체가 되지 않았으니 문은 열려 있다는 의미인데 다들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 해석하더라. 난 지독한 정치혐오자여서 정치에 몸담을 생각은 없다. 다만, 국정원 사건처럼 내가 목소리를 아무리 높여도 해결되지 않고 기득권의 문이 너무 높고 두꺼울 때는 내가 국회의원이 되고 행자위에 들어가 국정감사를 요구하고 싶어질 것 같다. 그런 의미다."

요즘 가장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


"전에도 활발한 활동을 했지만 그다지 알아보는 이들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은 많은 분들이 알아보고 악수도 청하고 덕담도 해주신다. 고맙기도 하고 당연히 부담스럽다. 예전에도 학생들 가르치고 아이들과 놀아줄 때가 가장 행복했고, 지금도 전과 아주 다른 삶은 아니다. 다만, 확실히 속박과 구속에서는 벗어났다. 경찰대 교수 신분으로는 한 마디를 해도 그것이 경찰이나 우리 대학에 도움이 되는가에 대한 자기검열이 심했는데 그 굴레를 벗어나 자유롭고 홀가분하다. 하지만 그 자유가 방종으로 흐르지 않기 위해 더 나의 언행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도 잘 안다."



올해부터 '한국 사회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매달 강의를 시작한다. 마이클 샌델 교수가 아닌 표창원의 정의란 무엇인가.


"올바름이다. 누구나 자신이 올바르게 추구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담론을 통해 정의사회 구현에 보탬이 되고 싶다. 정의로울 때 인간은 가장 행복하다. 정의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알고 누구나 행복한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제는 극한대립과 갈등, 진영논리를 극복하고 진정한 행복을 찾을 때가 아닌가."

교수만이 아니라 프로파일러로서 탁월한 역량을 평가받았는데, 이젠 그 분야에서는 활동하기가 어려운가.


"아직까진 힘들 것 같다. 외국에선 민간 프로파일러가 범죄사건의 수사과정에 개입되어 역량을 발휘하는데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 것으로 기대한다. 다만, 앞으로도 묻지마 범죄나 사이코패스 등 범죄가 급증할텐데 우리 정부나 사회에 할 말이 많다. 성범죄자의 경우 '사형 선고나 화학적 거세를 하자'고 하면 가장 쉽고 간단하다. 국민들도 속시원해 한다. 하지만 그 범죄자가 왜 저렇게 되었을까를 따져보고 문제가정에도 개입해야 한다. 그러려면 인력과 재원이 필요해 국정 우선순위의 조정이 필요하다. 힘들고 귀찮고 시간이 소요되는 일이지만, 다들 조금 불편해도 사회적 담론을 만들고 뿌리를 해결해야 우리 사회, 우리 국민들이 안전해진다. 그것이 정의롭고 행복한 사회가 아닌가."

경찰대 교수에서 물러났어도 그는 천생 경찰이고 범죄학자였다. 아버지가 경찰대 교수라는 것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하던 초등학교 4학년 아들은 그가 사직서를 쓴 날 "왜 상의도 없이 이런 일을 했느냐"며 울었단다. 그런 아들에게 "아빠가 더 유명해지고 더 좋은 일을 많이 할 것"이라고 그는 위로를 해줬단다. 그의 아들이 그를 진정으로 자랑스러워 할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그래야 우리 사회도 조금은 더 정의로워질 것 같아서다.

< 유인경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