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의식이 있다는 자들이 사이버에 꽤나 글을 물어놓고 다니는 게

소위 희망 버스라는 것이 있었는데

내가 보기에 희망버스란 노동자를 위한다는 것은 한 1%고
  
99%는 김대중의 서부벨트 + 수도권에서 떠나간 민심을

남해벨트를 지나 울산까지 올라가서

전라도 권력 하나 만들려는 것으로 보이는데.

1차를 찾아보니 없어서 언듯 본 기억으로 쓰면

1차 출발지는 서울, 수원, 광주, 전주, 순천으로 기억되는 데

서울이나 수원도 내가 보지 않아 모르지만 대체로 전라도가 아닌가 싶고

그러니까 전라도  중심의 권력하나 만들면서

민노당과 진보신당에 약간의 지분을 주고

부산 한진을 띄워서 노동자를 위하는 양 차별화를 시도하지만

그게 글쎄

내가 보기에는

김대중의 서부벨트에서 남해안을 타고 간다나 어쩐다나.

내가 보는 희망버스 작전대로만 대면 전라도가 대권도 잡겠지만

지금 보기에는 영 어림없어보이는군.

조선침략의 선봉장 천주교도 소서행장의 도주로와 유사하기도 하고.

소서행장은 순천에서 도망 갔나?

아, 천주교도 친일 매국노 김대중도 가고...




전태일이 죽은 것은 1970년 11월이다.


그리고 다음 해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김대중 유세는 1971년 4월에 장충단공원이었다.

장충단 공원은 전태일이 분신한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이고

또 그곳은 민비 시해사건에 순국한 자들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그때의 장소가 그곳이 대군중 유세에 적합했는지 모르지만

박정희 또한 그곳에서 유세를 했다.

여튼 김대중이 전태일 죽음과 연관성을 모르지만

전태일 분신과 선거와 사이가 오 개월이라면

전국적으로 반 박정희 여론이 뻗어나가기 좋은 시간이다.

(그때는 지금처럼 인터넷이나 핸드폰은 없었고,

전화, 티비도 드물었고 라디오도 드물었고

완행열차에서 입을 통해 전해졌기에 오 개월이다)

전태일의 죽음으로 최소한 수십만표 김대중이가 덕을 보았을 것이다.

거기 모인 군중들 적어도 오분의 일은 전태일 효과였을 것이다.

요상하게도 한국 대형 사건은 김대중이가 덕을 참 많이 봤다.

정치적으로 곤혹스러울 때나 등이 가려울 때는 때면 한 방(큰 사고)이 터진다.



그후 1972 년 유신헌법이 반포되었고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 - 이 당시인지 후인지 모르지만

그리고 한민통, 민단이라는 소리도 있고 조총련과도 통했다는 소리도 있는.

세월이 흘러 참여정부(노무현 대통령) 시절 김대중이

'한일 공동으로 납치 사건을 조사해야 한다'고 했다가

일본 관방장관인가, 누군가가

'왜 당신 집권 때 그런 것을 제기하기 않았냐' 고 받아치니

김대중이 꼬리를 내렸었지.

그 후 1974년 8월 15일에 장충단 공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국립극장에서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이 있었다.

전라도 골상과 흡사한 조총련계 문세광,

박정희를 노렸지만 실패하고 육영수 여사가 저격당했다.

만약 이때 박정희가 서거했다면 누가 대통령이 되었을까?

지독히 민주적 절차를 밟아도

김대중이가 코도 안 풀고 대통령이 되지 않았을까?



요상하게도 한국의 대형 사건, 사고가 날 때는 대부분

김대중에게 유리하게 돌아간다.

등이 가려울 때 안성맞춤으로 긁어주는 것처럼.



그 이후 대통령이 된 김대중,

극소수 김대중 패거리나 투기 자본이 살맛나는 세상이었지

지금 사회적 문제가 되는 비정규직, 금융권

독도, 그리고 수없이 쓰러지고 죽어간 서민들, 노동자들

내가 알기로는 김대중 시절 수천명이었다.

다른 시기에도 노숙자는 있었고 일 년에 한 이십 여명 죽었다면

김대중 때에는 1년에 수백 명 죽었다.







전태일 분신을 보자.

얼마 전 모 씨(기자 겸 무슨 또 직책이 많으신 분)가 새로이 밝혀진 사실이라면서 쓴 것을 봤다.

'전태일은 그간 옆에 000이 불을 붙였다고 되었는데 전태일 스스로 붙였다.'고.

그때 석유였는데, 석유는 신나나 휘발유와 달라서

불 붙이기 쉽지 않고, 불이 붙어도 신나처럼 한번에 활활 타오르자면

이미 불이 붙은 어디에 뛰어들어야지?그 당시는 성냥이었을 것이고,

뭐 기자가 직접 들었다고 하니, 뭐 그렇다니 그런 줄 알아야지.


전태일 분신을 보자.

경상도 정권 박정희 시절, 노동탄압(근로기준법 준수)에 반발한

경상도 전태일이가 의분을 품고 혼자서 분신을 했다.

그리고 그 후 기념사업회 이사장 거의 줄줄이, 직원들 거의 줄줄이 누가 궤어찼지?

요즘처럼 직업 얻기가 하늘 오르기보다 힘든 때에 줄줄이 누구들이 있나요?

경상도 서민과 경상도 권력이 피터지게 싸우고 어부지리는 전라도가 가져가는군

그리고 또 문학상도 거의 전라도 등이겠군.

노동상은 현대노동조합 등에서 나왔지만 그것도 경상도에 있는 공장에서

경상도 집권한 권력에 저항이었고.

경상도 집권과 서민, 민중을 불리시키기 위한 이간계?

여튼 사람 뒷통수치기 올림픽이 있다면 전라도는 한 백 연패는 할 것이다.

왜 전태일이었고, 전태일 혼자였지?




아래는 서프라이즈에서 퍼왔음

(내용에 보면 '서울/경기 수도권에 전라도가 30%'라는 데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30%가 아니라 수도권 이천만 중 삼백만 명 정도가 전라도일 것이다.

전태일은 인간 불화살 제1호



1970-80년대에 발생한 인간 불화살이 된 노동자는 17명,

그 중 전태일이 제1호인 것이다.

이 17명의 불화살 중에는 위장취업한 대학생은 단 한명도 없다.

모두가 위장 취업한 대학생들이 점찍은 가난하고 순진한 노동자들이었다.

결국 분신한 노동자들은 꾀임에 빠진 희생양들이라 할 수 있다.

전태일이 그 첫 케이스였던 셈이다.


이제는 호적 등본에도 원적이 어디인지 나오지 않는다. 서울/경기의 수도권에 사는 전라도 것들이 무려 30%이다. 그러나 이 천민(전라도)들의 본적은 전라도가 아니다. 본적을 옮겼기 때문이다. 옛날 같으면 호적 등본을 보고 원적이라도 알 수 있었지만, 이제는 호적 등본에도 원적이 나오지 않는다. 모든 것이 김대중의 업적이다.

전라도 것들은 대한민국의 여론을 조작하며, 영원히 대한민국을 지배하려 할 것이다. 훗날 이 천민(전라도)들로 인해 대한민국이 망하고나면, 그 때 가서야 타 지역 사람들은 정신을 차릴 것이고, 미래는 암담한 현실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다음은 전태일이 불타 죽을 때 뒤에 있던 사람들의 명단이다.

김대중이 왜 주민등록의 본적을 없앴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기준법을 준수하라


(주:진정서의 한 페이지에 가득차게 적혀있다)


주민지 서울특별시 성북구 쌍문동 208
성명 全泰壹


현주소 서울 용산구 서계동 33의 38호
성명 이0섭


현주소 서울시 성동구 하왕십리 산 14번지 13통 9반
성명 申0哲


현주소 서울시 용산구 서계동 33의 38호 3통
성명 崔0寅


현주소 서울시 성동구 하왕십리 890-99호
성명 주0민



본적지를 표시했을 경우........



기준법을 준수하라


(주:진정서의 한 페이지에 가득차게 적혀있다)



본적 경북 대구시 삼덕동 149
주민지 서울특별시 성북구 쌍문동 208
성명 全泰壹

본적 전남 화주군 동강면 곡천리 911
현주소 서울 용산구 서계동 33의 38호
성명 이0섭

본적 전남 광산군 명동면 지축리 96
현주소 서울시 성동구 하왕십리 산 14번지 13통 9반
성명 申0哲

본적 전남 영암군 신북면 행정리 53
현주소 서울시 용산구 서계동 33의 38호 3통
성명 崔0寅

본적 전남 고흥군 호두면 남촌리
현주소 서울시 성동구 하왕십리 890-99호
성명 주0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