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독립운동의 역사-김삼웅/한시준 (159)
제4장 3·1운동의 전개, 3·1운동의 요인/제1권 한국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 view 발행 |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어느별 2013.01.07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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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3·1운동의 전개


3·1운동의 요인

지방운동의 특수성


1. 3·1운동의 요인

1. 항일의식의 기저

3·1운동을 일으켰던 우리의 민족적 역량은 당시의 지도자적 측면과 대중적 측면이 다를 것이고, 대중적 측면도 지역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운동을 일으키는 더 직접적인 도화선도 같을 수 없을 것이다.

강원도에서 3·1운동의 원류는 의병운동에서 먼저 찾아야 할 것 같다. 註1) 의병운동에서 강원도는 사람과 산을 제공했다. 을미의병은 많은 포수砲手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전국에서 관포官砲·사포私砲가 가장 많은 강원도에서는 많은 인원이 동원되었고 註2) 정미의병 때부터는 강원도 전역이 의병의 격전지였으니 말할 것도 없다. 그리하여 항일기반이 산촌에 이르기까지 조성되어 있었다. 더구나 강점 후에 잔여의병이 도내의 산협에서 화전민으로, 혹은 술장사로 가장하여 숨어 살다가 3·1운동 때 선봉에서 활약한 사실은 한말의병사와 3·1운동사를 그대로 이어주는 사례일 것이다. 인적 연결이 안되더라도 의병의 활동이 치열하던 고장이니 항일의식이 퍼져 있었을 것은 생각하기 어렵지 않다.

다음에는 사상적 기저로서 5백년 유교왕국의 전통에서 마련된 전근대적 민족감정과 천도교적 민족주의, 그리고 신교육을 표방한 학교 및 기독교의 전파 등으로 퍼지게 된 근대사상을 들 수 있다.

먼저 유교적 민족감정을 생각해 보면 이것은 한말의병사와 연결된 반제국주의 성격으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유교철학이 불신받고 새로운 기운이 짙었던 당시라고 하더라도 아직은 유교적 민족감정이 가장 비중이 높던 것으로 조사된다. 물론 평안도지방과 같이 정신구조의 변화가 빨랐던 지역도 있지만, 강원도의 경우는 교통통신이 외국과 연결된 곳도 아니며 중앙과도 용이한 곳이 아니어서 신문화의 유입이 늦었다. 영동지방이 보수성이 짙었음은 교통관계로 보아 말할 것도 없고, 영서지방도 위정척사적인 보수세력의 근원지였다.

영동지방은 동학농민전쟁 때도 그랬고, 3·1운동 때도 천도교 교세조차 한산하던 곳이다. 동학농민전쟁 때는 영월·평창·정선지방의 동학도가 영동으로 몰려갔으나 영동에서는 반동학군을 형성하여 대항할 정도였는데, 그것은 유교적 배경에서 이루어졌다. 註3) 그리고 3·1운동 때는 영동 최북부인 통천에서 천도교인의 활약이 나타날 뿐 그 외의 지역에서는 거의 천도교인의 활동이 없었다. 註4) 그리고 기독교의 경우에도 유학의 기반이 굳은 곳이어서 널리 전도되지 못한 실정이었다.

영서지방은 극단적 보수세력의 근원지였는데 그것은 이 지방의 유림을 두고 말한 것이다. 이 지방에는 양평의 이항로 학통을 이은 김평묵金平默·유중교柳重敎·홍재학洪在鶴·이소응李昭應·유인석柳麟錫이 살던 곳이며 홍재학은 강화도조약 반대소反對疏에 이어 신사척사소辛巳斥邪疏 때문에 처형되었지만, 유인석·이소응은 을미의병사에서 대표적 인물이었으나 가장 과격한 보수세력의 고장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유교적 향풍이 짙었는데 3·1운동 당시만 해도 철원·평강 등지를 제외하면 전역이 조운의 길을 따라 교통하고 있었고 영동과 영서의 교류도 산길을 따라 이루어졌으므로 5백 년 토착의 유교철학이 크게 흔들리지 않았던 곳이다. 註5) 그리고 합방을 계기로 도내에는 거의 마을마다 글방서당이 생겼다. 그것은 신문화 유입에 대한 반사적 현상으로도 볼 수 있으나 망국과 더불어 보여준 유교적 항일태도의 단면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리라고 생각한다. 또 그것은 유풍의 대중성을 말하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전국적으로 맞지 않을 터이지만, 강원도의 농민은 밤에는 글방에 가고 낮에는 농사하는 농민이 많았고, 또 글방에 나가는 농민이 아니더라도 유풍 즉 군사부철학君師父哲學의 생활감각은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3·1운동의 사상적 기저에서 먼저 유교적 항일의식을 손꼽아 두는 것이다. 그리고 강원도의 경우에서는 이것이 가장 비중이 높았던 것으로 조사된다.

유교의 영향이 강력하였던 것은 기독교세력이 대중화되어 있지 못하였고, 천도교의 경우는 영서지방에 포교되어 있었는데, 포교기간이 비교적 길지 않았던 북부지방에서는 천도교인으로 서당교사가 많았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평강과 이천지방의 서당교사는 모두 천도교인이었다.

다음에 천도교에서 사상적 원류를 찾아보았는데 이를 항일의 측면에서 천도교적 민족주의라고 이름해 본다. 강원도내의 천도교 교세는 거의 영서지방뿐이었다. 영서지방에서도 북부는 신흥지역이고, 원주·횡성·홍천·영월 등 남부는 동학교의 초기부터 교세가 부식되어 있었는데, 횡성은 3·1운동 때 도내에서 유일한 대교구였다. 천도교가 민족종교이니 민족운동의 사상 기저가 될 것은 당연하나, 교주 손병희가 33인 대표가 되었다는 데 종교적인 고무를 받았을 것은 물론, 천도교 국가건설의 의욕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천도교인이 관여한 것으로 춘천 이북 지방에서는 철원에서 3월 10일, 11일, 12일의 운동과 화천의 3월 28일의 운동, 금화군 창도昌道의 3월 28일과 29일의 운동을 제외하면 모두 천도교회 단독으로 추진한 운동이었다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다음에 신문화의 영향을 받아 근대적 민족주의가 사상기저에 일원류를 형성했다는 점은 타도에서는 가장 중요한 몫이 될 것이다.


3월 1일 하오 2시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들


신문화의 영향은 두 가지의 경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기독교에 따라서 들어온 신사조이고, 하나는 각종 학교를 통해서 파급되는 사조였다. 기독교는 강원도 내에 천주교회도 있었으나 전연 관여하지 않았으니 논외로 하고, 신교계에서 포교협상에 따라서 감리교가 전도되어 있었으므로 감리교도가 크게 참여하였다. 그런데 토속성이 강하고 감수성이 둔한 도민성道民性과 선교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대중사회에 침투되어 있지는 못하였다.  때문에 3·1운동 때 광범위한 운동을 계획하지도 못했고 수행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철원·홍천·양양에서는 타조직과 합세하였고, 강릉과 통천군 장전에서는 단독으로 추진하였으나 단독추진의 경우는 대중운동으로 발전시키지 못하였다.

신교육을 통한 민족주의사상의 파급은 주로 사립학교의 영향이 컸으나 공립학교의 경우도 뜻있는 교사에 의해서 민족사상을 배양시켜 갔다.

3·1운동 당시 강원도 내의 공립학교는 중등으로 춘천농업학교, 원주와 강릉·철원의 간이중학교와 인제의 간이공업학교 외에 보통학교가 30개교가 있었다. 사립학교는 한말 인가교 57개교, 1913년에는 31개교가 있던 것이 3·1운동 당시에는 9개교뿐이었다. 그런데 그 밖에 철원과 강릉에 농민야학이 있었다는 것이 주목된다. 註6) 철원의 것은 그 곳 신청년들이 경영한 것이고, 강릉의 것은 초당의숙草堂義塾이 폐교당한 후 그 마을의 창동회에서 초당의숙의 뜻을 이어받아 설립한 것이다. 지금 강릉시 초당동에 있었는데 영어학교로도 불리던 초당의숙에는 한때 여운형呂運亨이 교사로 있었고 그의 영향으로 창동회가 결성되어 있었다. 그 창동회와 야학생이 선봉이 되어 4월 4일 농민에 의한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註7)

이상에서 사상적 기저에 대하여 말했는데 강원도에서는 불교계의 운동이 제외된다. 그러나 3·1운동 때 한용운이 설악산 백담사에 있었고, 3·1운동 후 상해 임시정부에서 오대산 월정사에 있던 이종욱李鍾郁·송세호宋世浩의 활약이 컸고 3·1운동 후 강원도의 독립운동단체인 철원애국단鐵原愛國團이 철원의 도피안사到彼岸寺에서 결성된 점 등을 고려하면 불교의 어떤 영향도 생각해 볼만하다. 그러나 조사에 의하면 사상적인 면도 그렇지만 나타난 사례에서도 관계있는 것을 찾을 수 없었다. 중앙에서 독립선언서를 지방에 배포할 때도 불교계통으로 강원도에 전달된 예는  예는 없다. 註8) 그리고 혹간의 기록에 양양에서 불승들의 시위가 있었다는 것이 있는데 註9) 조사해 본 결과 그런 사실이 없었음을 확인하였다.


2. 대중운동의 배경과 조건


위에서 말한 것은 민족운동의 원류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3·1운동의 보다 직접적 요인은 중앙에서는 일제의 무단정치, 경제적 침략, 그리고 당시 세계사조로서 민족주의의 표현인 윌슨의 민족자결의 원칙, 광무황제의 승하 등을 들수 있다. 강원도 지방에서는 지방민에 직결되는 농민에 대한 경제적 약탈과 지방행정상의 문제, 그리고 광무황제 승하에 대한 신민적臣民的 통분과 독살설에 대한 민족감정의 폭발로 요약할 수 있다. 이것은 3·1운동이 어느 정도 고개를 숙였을 때인 그 해 6월 각도 헌병대장警務部長 회의석상에서 강원도 헌병대장도 그렇게 지적하고 있는데 註10) 강원도와 같은 교통이나, 지리조건과 민도民度를 생각하여 보면 윌슨의 자결주의니 헌정운동이니 하는 세계사적 조류가 들어올 정도로 기반을 갖추기 못하고 있었으니, 피상적 논리인 세계사적 조류를 강원도 같은 곳에도 적용하려고 해서는 안될 것이다.

경제적 착취는 농·어·산촌과 관련이 깊은 것인데, 이것은 지방행정상의 문제와 더불어 대중운동의 원인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3·1운동은 앞에 말한 민족적 역량의 기초 위에 대중적 이유가 축적된 것과 고종의 독살설이라는 민족감정상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 지방사적 요인이 될 것이다. 일제의 경제적 착취와 지방행정상의 문제는 일반적인 것과 강원도의 특수한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918년 토지조사사업을 끝내고 경제수탈의 기초를 완성한 것, 또 그에 따르는 문제들은 우리나라 일반적인 문제일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각도 헌병대장 회의서류에 강원도 헌병대장은 지방행정에 대한 불평으로서 ① 공동묘지제, ② 화전경작 제한, ③ 임산물 채취의 부자유, ④ 주연초세酒煙草稅 등을 들고 있다. 본인이 조사한 바로는 여기에 첨가하여야 할 것으로 ①어업분야의 침략, ② 외국인의 기업적 농업과 상권문제, ③ 도로 공사에서 저임금과 부역賦役, ④ 일인의 오만성 등이 추가되어야 한다.

강원도 경무부장이 지적한 것도 충분히 이유가 있는 것이다. 공동묘지를 설정한다고 사유지를 빼앗는 경우, 또 사설묘지라 하여 일제에 협조하지 않는 사람의 무덤을 파헤치는 경우 註11) 같은 예는 특히 유가도의儒家道義나 재래 양풍良風으로 보았을 때 반일감정을 격화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또 화전제한이나 임산물채취의 부자유라는 것도 임야측량을 하고 사유림 신고라는 절차를 까다롭게 하여 실질적으로 사유림 신고를 방해하여 註12) 일제의 소유로 확정한 후 농민의 땔감 채취를 박탈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강원도의 경우에 화전민의 수가 지금도 많은데, 당시 삼림법을 고쳐 ‘삼림령’을 공포하고 국유림구분조사國有林區分調査 및 임야조사사업林野調査事業을 하면서 발을 묶으니 반발이 없을 수 없었다. 양양의 3·1운동 때, 설악산중雪嶽山中에 있던 오색주재소五色駐在所가 제일 먼저 철수하였다. 오색주재소는 주로 화전민을 상대로 하던 곳이었는데 그 곳에서는 시위도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철수한 것이 그것을 말한다. 삼척의 경우에는 국유림 구분조사 때문에 1913년에 이미 농민의 반항이 있어서 측량기수測量技手를 타살까지 한 예가 있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70여 인이 복역했다고 하니, 註13) 일제의 경제적 침략과 그 방법이 얼마나 강압적이었던가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임야소유권문제에서 국유림과 사유림의 경계측정에 대해서는 앞의 삼척군 원덕면 임원리의 경우 외에도 사유림에서도 친일배의 것과 일반인 것과의 사이에 말썽이 많았고, 소유자 신고서류에 당시로서는 힘에 겨운 현지 측량 도면을 구비하는 등 까다로운 절차로 말미암아 일제 혹은 친일배에게 빼앗기는 경우가 많았다. 註14) 또 국유림을 일본인에게 불하한다든지 혹은 이용권을 준다든지 하여 그 일본인이 한국인을 고용하여 숯장사 등을 하였다. 당시 춘천군 북산면 오탄梧灘리 이교관李敎寬을 중심으로 추진하던 만세운동이 미수에 그쳤지만, 이들은 처음에 그 마을에서 숯공장을 하고 있던 일본인 좌등佐藤을 쫓아내는 것을 계획했던 것이다. 註15) 연초세의 경우도 농민에게는 가혹한 것이었다. 연초세법은 원래 1909년에 공포 시행하던 것인데 국치 후 일제는 총독부의 재정수입을 높이기 위하여 1914년 전법을 폐지하고 연초세령을 공포하였던 것으로 종래의 경작세·판매세 외에 제조세와 소비세를 신설 부과하였던 것이다. 1918년에는 엽연초葉煙草 소비세까지 추가로 과세하였으니 농민의 불만은 점점 높아갔던 것이다. 註16) 이것은 직접세였던 만큼 일인경작자와의 차별대우도 심하여 항일감정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어업문제에서는 우리의 민족자본이 약하고 어업이 전근대적 형태를 벗지 못하고 있던 때이므로 일제의 경제력과 기술에 무참히 밟혔던 것은 예사로운 일이었다. 강원도에서 삼척 정라진汀羅津, 강릉 주문진注文津, 양양의 대포항구大浦港口 그리고 고성의 장전長箭과 통천의 고저庫底에는 일인의 지배하에 어업이 이루어져 1913년에 이미 130개 업체가 들어와 있었다. 때문에 고저에서는 항구 노동자가, 대포에선 어민이 참가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대포의 경우에는 일본인들은 경찰을 제외하고 모두 바다로 도망쳐야 할 정도로 어민의 항쟁은 결렬하였다.

다음에 외국인의 기업적 농업과 상권문제라는 것은 앞에 말한 연초경작의 경우 일본인이 지주로서 연초경작업을 하며 우리 농촌을 침식하는 예도 있고, 아편을 재배하여 우리의 농업노동자를 착취하던 경우도 있다. 연초재배가 광초光草일 경우라도 타농작물에 비하여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며 아편일 경우에는 그것의 재배특권栽培特權이나 공해문제公害問題는 두고라도 일본인의 직접노동에 의한 재배가 아니라 한국인을 고용하고 있었으므로 이에 따른 저임금 등의 이유로 부락민과의 충돌이 잦아 반일감정이 고조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원주군 흥업면興業面 흥대리興垈里에는 일본인 아편재배자들이 살았으며 3·1운동 때 일본인을 도와준 면장을 공격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註17)

3·1운동 때는 신작로를 만들고 있던 때였다. 강원도에서 신작로가 완성단계에 있었던 것은 동해안의 도로와 충주에서 원주·춘천·김화를 거쳐 평강으로 통하는 길과 횡성에서 강릉으로 통하는 대관령 통로였다. 그 밖의 것은 공사가 진행중이었는데, 공사에는 임금을 지불하는 경우에도 최저임금으로 혹사했는데 부역으로 메워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홍천에서 4월 1일 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인제로 통하는 도로공사에 부역하던 홍천군 북방면민들은 뒤늦게 만세운동의 소식을 듣고 몰려와서 군수 김동훈金東勳의 손과 그의 칼을 꺾어버렸다. 註18) 이때 도로공사에는 각 동리별로 담당구역을 정하여 부역시켰으니 신설도로를 위한 노력부담은 농민에게 실로 과중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2중 3중으로 착취당하고 있던 농민이어서 일제에 대한 반발의식은 그들의 의식구조를 지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1910년대 토지조사사업과 더불어 일제의 농업이민으로 자작농의 전락, 자작 겸 소작농의 토지유실 등으로 말미암은 소작농의 증가가 농민의 항일의식을 고조시킨 원천적 이유가 되었으나, 일제의 지방행정상의 갖가지 횡포는 일제에 대한 반항적 기풍을 고조시키는 일상생활의 이유가 되었다. 그러한 반일감정을 헌병경찰의 폭정으로 억압하고 탄압하고 있었다.



3. 반일감정의 고조


이러한 때에 우리의 민족감정을 자극시킨 것이 광무황제의 승하, 특히 독살설이었다. 농촌사회는 감정적 결합사회이기 때문에 이익사회都市와 같이 의식구조가 복잡하지 않다. 따라서 고종의 서거가 유교사회의 지배계층이 아닌 농민이라고 해서 무관할 까닭이 없었다. 더구나 항일감정이 쌓여 있던 당시였으므로 대중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더욱이 독살설로 퍼져나가는 상황하에 반일감정이 극도로 고조될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일제 측 기록에도 이등박문伊藤博文의 피살 당시 애도회를 갖는다든지 혹은 관청이 3일간 휴업하였는데 고종 승하 때는 하등의 조의를 표하는 절차가 없었던 것에 대해서 불만을 표시한다는 양양지방의 민정보고가 있으며, 註19) 춘천·원주·양양·철원·강릉·평강에서는 망곡식望哭式이 거행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註20)

망곡례望哭禮는 일제가 동곡식慟哭式으로도 표현하였는데, 그들이 보고한 것 외에 본인이 조사한 것만으로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정선에서는 마을 앞의 냇가에서 예를 올렸고, 영월과 평창·홍천·원주에서는 뒷산에 올라가 망곡하였다. 대개 뒷동산이나 달맞이 하는 곳에서 망곡례를 올리는 것이 통례이고, 망곡 후에는 백립白笠으로 갈아쓰고 돌아왔다. 원주와 횡성의 경우에는 보통학교 학생이 상장喪章을 달았다는 일제의 기록이 있으며, 註21) 양양지방 조사 때 보통학교 생도들이 삼베로 머리에 띠를 두르고 시위한 사실을 찾을 수 있었다.

광무황제는 대한제국의 상징적 인물로 우리 겨레의 마음에 새겨져 있었던 당시였다. 3·1운동 당시는 시민적 정치사상이 대중사회에 널리 보급되어 있던 때가 아니었으므로 고종의 서거는 국망의 통분을 다시 되새기게 하였고, 그것도 독살설로 유포되어 반일감정은 더욱 격화되었다. 독살설로 유포되지 않고 단순한 서거로서만 지방에 전달되었다면 민족감정을 격분시킨 정도가 낮았을 것이고 유림측의 동정도 약간은 달랐을 것이다. 그런데 독살설로 전달되어 그것이 지금까지의 항일의식에 점화되어 시위운동을 더욱 힘차게 폭발시켰다.